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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산다는 것의 나쁜 점은 단연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안 한다는 것이다. 내가 밥을 하지 않으면 그날 먹을 밥이 없다. 내가 빨래를 하지 않으면 그날 입을 옷이 없다. 내가 청소를 하지 않으면 당연히 집은 더럽다. 아무도 나를 위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해주지 않는다. 내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뭐든지 알아서 '자력갱생' 해야만 한다.
그리고 반면에, 혼자 산다는 것의 좋은 점은 나 하나만 참으면 된다는 것이다. 나 하나만 그날 굶는 것에 동의하면 굳이 밥을 할 필요가 없다. 하루 정도 너저분한 집에서 살 각오가 섰다면 굳이 청소를 할 필요도 없다. 꼬질꼬질한 행색을 하루 정도 견디기만 한다면 빨래를 내일 하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다. 뭐든 이런 식이다. 동전에는 앞뒷면이 있는 것처럼. 무슨 날이면 으레 무언가를 헤야 한다는 식의 몇몇 루틴들도 그렇다. 설날이면 떡국을 먹어야 한다든가 추석이면 송편을 먹어야 한다든가 하는 일들 말이다. 어차피 우리 집엔 이제 나 말고는 아무도 없고, 나 혼자면 눈 딱 감고 그깟 송편 굳이 먹어야 되느냐고 '배를 째면' 그걸로 끝이다. 누구를 설득할 필요도 없고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다.
며칠 전 추석 연휴랍시고, 남들처럼 잡채에 전에 튀김에 온갖 맛있는 것들을 다 해놓고 먹지는 못할 망정 소고깃국이라도 좀 끓여다 놓고 먹자 싶어 필요한 몇 가지를 사러 근처 마트에 갔었다. 송편도 응당 사 오려고 했는데, 예상외로 그 흔한 냉동 송편조차 팔지 않아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 근처엔 떡집이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어디 있는지를 모른다. 그러니 여기서 굳이 송편을 먹겠다면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다른 마트에 들러서 그곳에서 송편을 사 오는 수밖에는 없다. 그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사를 지내는 것도 아니고, 나 말고 입이 하나 더 있어서 그 눈치를 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나 하나 먹자고 그 귀찮은 짓을 하겠나 싶은 생각에 올해 추석은 그냥 송편 없이 대충 보내기로 그렇게 마음먹은 참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연휴에 접어드는 어제 아침, 푹푹 끓인 소고깃국으로 점심 한 끼를 먹고 나니 아무리 그래도 추석은 추석인데 송편 한 조각 먹지 않고 넘어가는 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 아무래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외부의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납득시키는 데 실패하고, 결국 그 길로 버스까지 타고 다른 마트에 가서 냉동 송편 한 봉지를 사 왔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이젠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데도, 나는 어떻게든 설날엔 떡국을 먹고 생일엔 미역국이라도 끓여 먹으려고 애쓰면서 그렇게 살고 있다. 나 하나만 참으면 되는데, 그걸 못해서. 어쩌면 그건 내가 참는 걸 못하는 게 아니라 가뜩이나 혼자 지내는데 그런 거라도 챙겨 먹으라고, 그가 옆에서 총대질을 놓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