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절대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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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얼마 전 지인에게서 받은 지장경을 읽고 있다는 이야기를 썼다. 길이가 그리 길지 않아 입을 다물고 읽으면 하루에 일독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냥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자리에 눕기 전 두 품 정도씩을 소리를 내어 읽고 있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고 그런 식으로라도 말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이다. 집에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전화라도 오지 않으면 입을 뗄 일이 드물고, 그 전화통화라는 것도 요즘은 카톡이 상당 부분 대체해 버려 이런 식으로라도 입을 벌리지 않으면 하루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날도 가끔 생기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그나마 말을 좀 많이 하는 곳이 그의 봉안당 앞이다. 그의 봉안당에 들르면 대개 내가 독채로 전세를 낸 수준이다. 때마침 그날 장례를 마치고 안치를 하러 오신 분이 계시고 그분의 안치 절차와 시간까지 정확히 겹치지 않는 이상 봉안실 내부에는 거의 나 외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래서 나는 안내데스크에서 사 온 꽃을 헌화대에 올리고는 그의 사진을 쳐다보면서 실컷 온갖 넋두리를 '육성'으로 한다. 그래도 별 문제는 없다. 어차피 아무도 없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쉬고 계신 다른 분들이 계시겠지만, 어차피 그런 분들이야 내가 소리를 내어 말하니 입 속으로 말하나 듣고자 하면 다 들으실 수 있으실 테니 이러나저러나 똑같지 않나 생각한다. 그래서 그를 만나러 봉안당에 가면 한참이나 뭐가 이러니 저러니 하는 나만의 수다 타임을 실컷 가지다가 나오곤 한다.


그러나 그런 게 안 되는 날이 며칠 있다. 대표적으로 설날, 추석, 크리스마스가 그렇다. 이 날은 나 말고 다른 분들도 많이 그곳에서 쉬고 있는 분들을 보러 오시기 때문에 아무래도 나 혼자 있는 것처럼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고 갈 수는 없다. 그래서 거의 들리지도 않는 입모양으로 간단한 인사를 하고, 조용해지면 다시 올게, 하는 인사만 남기고는 봉안당을 나서곤 한다.


오늘은 추석이고, 아마도 나 외에도 많은 분들이 영원한 안식에 든 분들을 보러 올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아마도, 결국 추석 연휴를 통째로 날려먹게 만든 그 고약한 일정에 관한 문제도 그를 붙잡고 제대로 하소연할 수도 없을 것이며 그 외에도 줄줄이 산적해 있는 내 인생의 몇 가지 머리 아픈 일에 대해서도 오래 징징거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사 간 꽃이나 놓고 추석인데 송편이나 한 접시 먹었느냐는 인사 정도나 하고 물러나오는 것이 고작이지 않을까. 지금껏 내내 그랬으니 아마 올해 추석도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얼굴 마주 보고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 나눈 지도 2년 반이 훌쩍 지났는데 웬만하면 꿈에라도 한 번 좀 다녀가라고, 다른 건 몰라도 오늘은 그런 떼나 좀 실컷 쓰고 와야겠다. 혼잣말은 한계가 있고, 대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말을 주절주절 떠드는 건 생각하기 따라서는 퍽 면구스러운 노릇이니까 말이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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