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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추석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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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그와 나는 공식적으로 결혼을 한 사이는 아니었다. 세상에 흔한 케이스로 식은 생략하고 호적만 같이 쓰는 그런 사이조차도 아니었다. 그와 나는 서류상 아무런 접점도 없는 '남'이었다. 그게 아마도, 그 사람이 자기가 네 옆에 오래 못 있을 걸 미리 알고 그랬나 보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지인분들이 더러 계신다. 그래서 한 남자만 20년 넘게 사랑하며 살았음에도 나는 아직 법적으로는 '미스'다.


그리고 오늘은, 그런 우리가 결혼기념일 대용으로 챙기던 기념일이다.


처음 이 날이 기원이 되던 그 해의 9월 13일은 추석 연휴의 한가운데였다. 그리고 덕분에 해마다 이 날은 거의 언제나 추석 연휴의 조금 앞이나 조금 뒤에 든다. 그리고 올해도 어김없이 연휴의 시작 혹은 직전에 끼어 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오늘 대충 근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떠나거나, 혹은 내일 아침 일찍 떠날 채비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드실 것이다.


썩 유쾌한 추석 연휴는 아니다. 어제 징징거린 그 일정 문제는 결국 어제까지도 해결이 나지 않았고 오늘 안에 해결이 나지 않으면 별 수 없이 연휴를 홀랑 타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뭘 해도 내 연휴는 마음 한 구석이 무거울 것이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원래 마음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세상 돌아가는 꼴은 마음에 안 드니까. 아무리 인상을 쓰고 악악대 봐야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을 내 마음대로 해버리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마음을 조금 바꾸어서, 그 일을 제외한 다른 모든 골치 아픈 일들을 어제 해치웠다. 워낙 큰 덩어리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어 여전히 마음이 무겁긴 하지만 그래도 자잘한 다른 것들을 싹 해치워버리고 나니 좀 기분이 나아지는 듯도 싶다.


물론 나는 추석 당일인 17일에도 봉안당에 갈 예정이다. 그러나 오늘도 봉안당에 간다. 추석은 추석이고 오늘은 오늘이기 때문에. 결국 이만저만해서 올해 추석은 두 다리 쭉 뻗고 즐겁게 지내기는 그른 것 같다는 그런 푸념이나 실컷 늘어놓고 오려고 한다. 우리 동네 마트에는 송편을 팔지 않아서 다른 장은 이것저것 봤으면서도 결국 송편을 사는 데는 실패했다. 봉안당 갔다 돌아오는 길에 좀 멀리 있는 마트에 내려서라도 송편 한 봉지 사 와야 할까. 아무리 그래도 추석은 추석이니까 말이다.


어느새 그가 떠나고 세 번째 혼자 맞는 오늘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만 좋은 데 도망가서 이 꼴 저 꼴 안 보고 속 편하게 사니 좋으냐는 강짜밖에 안 나오는 걸 보면 나는 아무래도 철이 한참 덜 든 모양이다.


2016022413317_0.jpg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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