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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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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외주 일을 하다 보면 몇 가지 법칙 아닌 법칙이 있다. 입금되는 날짜와 시간은 대개 계약서상에 언급된 가장 마지막 날의 은행 시간 마감 직전이다. '결과물 검수 완료 후 7일 이내'에 입금한다고 명시되어 있는 경우 검수가 끝난 다음날이나 그다음 날 입금이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개 계약서 상에 명시된 의무를 어기지 않는 최대한 늦은 날의 최대한 늦은 시간에야 입금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 주나 내일 주나 내일 준다고 만 원 한 장이 깎이는 것도 아닌데 왜 꼭 저런 식으로 끝의 끝까지 멱을 채우고서야 돈을 주는지 외주 일을 시작한 내내 궁금해하고 있지만 나는 아마 평생 그 심리를 알지 못할 성싶다.


때 아닌 추석에 일에 관계된 몇몇 사람이 코로나 확진 증상을 보이고 있어 추석 연휴 직후로 잡힌 마감(사실 이 일정부터도 상당히 마음에 안 들기는 했다. 이건 누거 봐도 추석 따윈 개나 주고 자리에 붙어 앉아 일이나 하라는 일정으로 보이지 않는지)을 아무래도 늦춰야 할 것 같다는 말을 이미 월초에 했다. 그러니 말을 꺼낸 지 이제 10일이 넘어가는 참인데 상대측에서는 가부간 아무런 답이 없다. 그러자고 흔쾌하게 오케이를 하던가, 도저히 안 되겠으면 죽어도 안 되겠다고 단호하게 거절하던가. 벌써 며칠 때 이제나 저제나, 공유된 구글 독스의 일정 관련 문서들을 생각날 때마다 리프레시하며 '그래서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거냐'는 말만 혼자 내내 되뇌고 있다. 담당자님의 말로는 이번 주 내에는 결론이 날 거라는데,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번 주 지나면 바로 추석이고, 그 추석 끝나면 바로 마감일정입니다만. 그러나 예의 담당자님은 그저 의사소통 창구일 뿐 이 일정에 관해서는 아무런 발언권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기에 달달 볶을 생각조차 별로 들지 않아 그냥 나 혼자서만 냉가슴을 앓고 있는 중이다.


오늘 그 일정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가부간 답은 없고, 결국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정이 미뤄지지 않는 것을 상정해 새로 작업 일정을 짜고 그에 맞춰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정에 이렇게 문제가 생긴 것은 나 하나만의 사정 때문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내 일정을 맞춘다고 해도 전체 일정이 과연 상대측에서 원하는 대로 추석 직후에 무사히 끝날 수 있을 건지 어떨지는 장담할 수 없는 성태다. 아, 아, 몰라 몰라. 알아서들 하겠지. 그렇게 버럭,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질러놓고 그냥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모드로 내 할 일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고 그런 계획을 세워놓은 상태다. 다행히 읍소가 받아들여져서 일정이 조정되면 좀 느긋하게 추석을 보내는 거고, 아니면 추석 지나고 나서 사이좋게 관련자 전원이 불벼락을 맞는 거겠지. 일정 전체를 핸들링할 권한도 없는 일개 외주 작업자인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냥 그것 하나뿐인 것 같다.


예전에 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그가 날마다 녹음해서 주던 고 신해철 님이 진행하던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프로그램에서 종종 나오던 신해철 님의 노래 중에 '마음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지 세상 돌아가는 꼴은 마음에 안 들지'하는 가사가 있는 노래가 있었던 것이 불쑥 생각나서 오후 내내 그 부분만을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흥얼거렸다. 잠깐 짬을 내 찾아보니 '매미의 꿈'이라는 노래인 모양이다. 오늘의 마지노선인 여섯 시까지만 기다려보고 오늘도 별 답이 없으면 오늘 저녁은 내내 저 노래나 들어야겠다. 참 뭐가 이렇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talk_img_01.png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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