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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찰랑찰랑한 생머리'에 대한 나의 로망 아닌 로망과 그 로망이 번번이 어떤 식으로 좌절되었는가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는 것 같다.
내 머리카락은 사실, 나라는 인간이 퍽이나 게으른 데다 뭔가를 가꾸고 꾸미는 데에 소질이 1도 없는 인간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도 그리 썩 예쁘게 기를 만한 머리는 못된다. 일단은 모질 상태가 그놈의 반곱슬이라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제멋대로 시키지 않은 웨이브가 져서는 태산같이 숱이 불어나 버린다. 아무리 애를 써도 머리가 날개뼈 아래로 잘 내려오지 못하는 데는 내 머리칼들이 제 길이대로 쭉쭉 뻗지를 못하고 제멋대로 구불거리는 탓도 클 거라고 나는 내 멋대로 생각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또 1년 가까이 꾸역꾸역 머리를 길러 왔다. 늘 그래왔듯이 뭘 어째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살다 보니 방치한 것에 가까웠지만.
그리고 지나간 연휴 내내, 좀 더 정확히는 어엿한 9월 중순 주제에 에어컨을 틀까 말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늦더위의 습격이 이어진 추석 내내 나는 '붙으라는 돈은 안 붙는데 쓰잘데없이 잘만 기는 머리칼'에 짜증을 더럭더럭 내던 끝에, 오늘 드디어 이 답 없는 머리칼을 단박 쳐내기로 마음을 먹고 아침 정리를 끝내 놓은 후 집 근처 미용실에 갔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하고 묻는 사장님의 말씀아 아우 그냥 다 필요 없고 대충 묶어지기나 할 기장으로 싹 잘라달라고 말씀드렸다. 세상에 날씨가 미친 것도 아니고 9월에 에어컨이 웬 말이냐고. 연휴 내내 연휴 끝나기만 하면 당장 가서 머리 자른다고 벼르고 있다가 온 거라고 몇 마디 했더니 한참이나 박장대소를 하시고는 조금 전에도 손님이랑 똑같은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하고 간 분이 계셨다고 하셨다. 그러게 날씨가 미쳤어요. 그런데 딱 봐봐. 이러고 나서 한 며칠만 있으면 이제 춥다고 긴팔에 패딩점퍼 꺼내야 될걸. 세상이 진짜 망하려나 봐요. 그런 다소 살벌(?)한 대화를 깔깔거리며 나누는 사이, 날개뼈 아래까지 수북하게 내려왔던 머리칼은 귀 아래 한 뼘도 안 될 길이로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손목에 걸었던 머리끈으로 짧아진 머리칼을 대충 묶고 밖으로 나오니 그 무겁고 더운 걸 도대체 어떻게 목 뒤에 치렁치렁 매달고 다닌 건가 싶어서 나의 미련함에 실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대개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그도 긴 머리를 좋아했다. 피차간 철이 들지 않았던 학생 때는 내 멋대로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나타났다가 된통 싫은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이러고 봉안당에 찾아가면 그 머리는 뭐냐고 아마도 물어볼 테지. 그러면 그냥 대답해야겠다. 텔레비전에 어떤 배우를 봤는데 단발이 너무 예쁘길래, 그냥 오랜만에 단발병이 좀 도졌다고. 그냥 그것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