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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중순을 넘겨 하순에 가까운데도 에어컨을 틀어야 되는 늦더위에 소갈머리가 나서 머리를 자르고 온 지 정확히 사흘 됐다. 그리고 이틀 째가 되던 어제, 열어놓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가워서 슬그머니 창문을 닫는 경험을 했다.
이럴 줄 몰랐던 건 아니다. 당장 머리를 자르러 갔던 미용실 원장님과도 며칠 안에 귀신같이 날이 서늘해져서 주섬주섬 긴소매 옷을 꺼내야 할 거라는 예언 아닌 예언을 나눈 적이 있었다. 아무리 날씨가 미쳤기로 지금은 9월이고, 다음 달은 10월이다. 끝없이 더위가 계속될 리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갑자기. 급작스럽게, 하루 사이에 기온이 10도 가까이 떨어지다니. 이건 좀 상도덕에 어긋나지 않나 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설마 정말 이대로 여름은 끝난 줄도 모르게 끝난 건가 하는 의구심이 아주 안 드는 건 아니지만, 그럼 이제 날짜가 9월 하순인데 새로 더워져서 뭘 어떡할 셈이냐는 생각이 더 많이 들고 있기도 하다.
목덜미를 덮은 머리칼을 석둑석둑 잘라내면서 미용실 원장님이 그러셨다. 이거 그냥 털모자야. 이거 하나 있고 없고가 차이 엄청나게 나요. 물론 겨울에는 반대로 이거 있으면 훨씬 덜 춥긴 하지. 그러게 이왕 자를 거면 한두어 달 일찍 자르시고 여름이라도 시원하게 나시지 이제 좀 있으면 날 추워질 텐데 지금 자르러 오셨냐고. 그때는 그냥 웃으면서 그러게요 하고 대답했다. 최소한 한 달 정도는 갈 줄 알았으니까. 연일 33, 34도를 오르내리는 정도는 아니나마 후덥지근한 기운 정도는 남아있을 줄 알았으니까. 정말 짐작도 못했다. 머리 자른 지 사흘 만에 날씨가 이렇게 귀신같이 서늘해질 줄은. 정말 미용실 원장님 말씀대로 머리를 자를 거면 좀 빨리 자르던가, 이왕 참을 거 한 며칠만 더 참아볼 걸 그랬나 하는 때늦은 후회에 하루 종일 훤하게 드러난 뒷덜미만 만지작거렸다.
경상도에서는 이런 식으로, 여름 다 끝났는데 선풍기를 산다든가 겨울 다 끝났는데 패딩을 사는 것 같은 행동을 두고 '디비 쫀다'고 한다. '뒷북친다' 혹은 '해야 할 때는 안 하다가 할 필요 없어지니 한다'는 정도의 뜻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런 식으로 장렬하게 디비쪼아 보는 건 회가 지천에 널려있던 고향에서는 회를 입에도 안 대다가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야 회를 배운 이후로 간만이다. 정말로 민망해서라도, 단발이 유난히 예쁜 연예인 사진이라도 하나 골라놓고 단발병 도졌다는 핑계를 대지 않으면 안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