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냄비의 은퇴 시기

-302

by 문득

우리 집에는 라면을 끓여 먹을 때 잘 꺼내는 편수 양은냄비가 하나 있다. 라면 한두 개 정도를 끓이면 딱 알맞을 정도의 크기다. 물론 정작 그는 이 냄비를 계란이나 면사리를 삶는 용도로나 썼다. 뭘 끓이든, 심지어 라면 하나를 끓이더라도 파, 양파, 표고버섯은 기본이고 온갖 부재료를 듬뿍 넣어서 라면 본연의 조미료 맛이 하나도 안 나게끔 만들어서 먹는 그의 조리법 상 이 냄비는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는 뭐, 라면도 한 개만 끓이고 부재료를 넣어본들 치즈나 계란, 대파 약간이 고작인지라 라면을 끓여 먹게 되는 날은 이 냄비를 아주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이 냄비는 우리 집에 있는 많은 냄비들 중에서도 꽤 고참급에 속한다. 언제 어떤 전차로 사 오게 됐는지까지는 미처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최소한 10년은 넘은 것이 분명하다. 그 서슬에 여기저기 부딪혀 약간 찌그러지기도 했고 까만 꼭지가 달려있던 뚜껑은 어느 날 꼭지가 깨져버려 이젠 아예 쓰지도 못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양은 냄비는 오래 쓰면 바닥이 둥그렇게 불룩해져서 평평한 바닥에 두면 제멋대로 기울어진다. 가끔 그런 양은냄비를 붙잡아다가 싱크대 바닥에 대고 꾹 눌러서 튀어나온 바닥을 다시 들어가게 만들곤 했는데 나는 그 작업을 '버르장머리 고친다'고 불렀다. 그렇게 한 번 '버르장머리 고친' 양은냄비는 또 한동안, 아무 데나 적당히 던져놔도 기우뚱거리지 않고, 뭘 끓여도 빨리빨리 잘 끓고, 가벼워서 한 손으로도 쉽게 휙휙 들 수 있고, 어지간해서는 따뜻한 물에 잠깐만 담가놨다 씻으면 눌어붙거나 탄 흔적도 없이 잘 닦여서 라면 끓일 때뿐만이 아니라 여기저기에 두루두루 쓴다.


오래된 양은 냄비에서는 뭐 몸에 안 좋은 물질이 나온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기도 하다. 새것일 때는 괜찮은데 오래 쓰면 양은이라는 재질에 포함된 몸에 좋지 못한 물질들이 녹아 나와서 조리하는 음식에 섞인다던가. 모르긴 해도 우리 집 양은 냄비는 최소 10년은 넘었으니 분명 그 기준에 의하면 사용하면 안 되는 수준까지 온 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걸 모르지도 않으면서도 나는 여상스레 그 양은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고 간단한 국도 끓여 먹는다. 그렇게까지 몸을 사리고 싶진 않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천년만년 살고 싶진 않다. 내가 이 세상에 남아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며, 그거 뭐 저까짓 양은 냄비 좀 안 쓴다고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기 때문에 말이다.


양은냄비를 오래 쓰다 보면 음식에서 '쇠 맛'이 나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모양이다. 그쯤 되면, 아마도 양은냄비가 난 할 만큼 했으니 은퇴 좀 시켜주십사 사위를 하는 것이겠으니 그쯤 되면 보내 주는 게 맞겠지. 그러나 그러지 않는 다음에야 나는 아마도 한동안 더 이 양은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그렇게 살 것 같다. 적당히 속 편하게.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기져왔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늦잠의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