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이 더 없기야 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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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여름에 날이 더우면 아무래도 잘 해먹지 않게 되는 음식이 몇 가지 있다. 가끔 입맛 없을 때 끓여 먹곤 하는 게살 스프도 그중 하나다. 여름에 뜨거운 국물 음식은 아무래도 꺼려지는 게 사실이라고는 해도 찌개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끓여다 놓고 서너 끼씩 먹는데 게살 스프만은 잘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이 건 한 번 끓여서 몇 끼나 먹을 수가 없고 그래서 뜨거운 불 앞에 붙어 서서 끓이는 품이 아깝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며칠 새 날이 좀 선선해졌기도 하고, 한동안 못 끓여 먹은 것이 생각나 간만에 게살 스프나 한 번 끓여서 먹어야겠다 생각하고는 마트에서 주문을 할 때 한참이나 뒤져서, 원 플러스 원으로 두 팩을 주는 게맛살을 샀다. 이렇게 해 두면 한 팩은 게살 스프를 끓이는 데 쓰고 남은 한 팩은 적당히 날짜를 봐서 게살 볶음밥을 해 먹으면 되니 두 끼나 게맛살로 해결할 수 있는 셈이다.


식은 밥이 좀 남아 있는 데다 게맛살의 날짜가 생각보다 촉박해서(보통 이렇게 원 플러스 원으로 파는 게맛살이나 비엔나소시지 등은 대개 남은 유통기한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정작 먹고 싶었던 게살 스프보다 볶음밥을 먼저 해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볶을 야채를 이것저것 썰어두고 마지막으로 게맛살의 비닐 포장을 벗기고 세로로 좀 쭉쭉 찢던 중에 뭔가 물컹 하고 손끝에 묻었다. 이게 뭐야, 하고 자세히 들여다 보니 통상의 게맛살과는 조금 다른 질감을 내는 뭔가가 게맛살 안에 들어있었다. 그제야 벗겨낸 포장지를 확인하고, 나는 이 게맛살이 여느 게맛살이 아니라 '치즈가 든' 게맛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적당한 가격에, 원 플러스 원으로 파는' 게맛살을 찾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이 게맛살이 어떤 게맛살인지 제대로 확인조차 해보지 않은 것이다.


아니 그런데, 오늘 볶음밥이야 볶음밥이라고 치는데, 치즈 든 게맛살로 게살 스프 만들어 먹어도 되나?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슬그머니 머리가 아파왔다. 떡볶이나 라면 같은 '빨갛고 매운 국물' 음식이라면 치즈가 들어가서 나쁠 리 없고 오히려 나 같은 맵찔이에게는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게살 스프는 치킨 스톡과 굴소스, 소금만으로 간을 하는 '하얀 국물' 음식이다. 이런 것에 치즈가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솔직히 그다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니 그러게 그걸 잘 좀 읽어보고 사질 않구서. 아무리 세종대왕님이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로 서로 사맞지 아니해서 이 좋은 한글을 만들어주시면 뭐하냐고. 덤벙거리느라 당체 읽어볼 생각을 안 하는데. 그렇게 나는 '원 플러스 원'에만 눈이 멀어 이 게맛살이 어떤 게맛살인지 제품 이름만 읽어봐도 알 수 있었던 사실을 묵살해 버린 나 자신에게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맛살의 유통기한은 9월 27일까지이니 정확히 이틀이 남았고 그 안에 뭔가 다른 '기깔난' 음식을 해먹을 플랜이 생길 것 같지도 않으니, 그냥 본래 계획대로 게살 스프나 해서 먹어야지 뭐. 그리고 뭐 못 먹을 게 든 것도 아니고 치즈인데. 설마 게살 스프에 치즈 좀 들어간다고 먹고 죽는 음식이 되진 않겠지. 치즈 좀 들어간다고 설마 맛이 없어지기야 하겠느냐고, 나는 또 그렇게 적당히 속 편하게 '뻔히 읽으라고 지어놓은 제품 이름조차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원 플러스 원에 낚인' 나를 쉽게도 용서하고 잊어버린다. 참 너 답다고, 어떻게 나는 변하지도 않냐고 분명히 그라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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