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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나고 나니 내 생일을 잊지 않고 축하해 주는 건 회원가입을 해 놓은 몇몇 사이트들 뿐이다. 나이가 마흔이 넘어가니 실제로 알고 지내는 사이에서도 생일 따위를 따로 챙기는 '간지러운' 짓은 잘 하지 않게 된 것은 나도 생각해 보면 마찬가지긴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내 생일축하 선물은 몇몇 사이트에서 보내 준 이걸 과연 실제로 사용할 일이 있긴 하려나 싶은 할인쿠폰들 뿐이었다.
그렇게 받아 챙긴 할인쿠폰들 중에 마트에서 받은 것이 한 장 있었다. 사용기한이 얼마 남지 않아서, 10퍼센트 할인쿠폰이니 대충만 따져도 5천 원 정도는 할인받을 수 있을 분위기라 일단 거두절미 사용하기로 했다. 이 마트는 요즘 자주 주문하는 곳과는 다른 곳이어서, 이곳에서만 파는 몇 가지 물건들을 주섬주섬 카트에 담고 그 외에 살 것들도 몇 가지 담았다. 그러고 나서 괜히 아쉬운 마음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중에, 무료 '김밥'이 눈에 띄었다. 아니, 요즘 마트에서는 김밥도 이런 식으로 제품으로 만들어서 팔아? 일단 신기했고 호기심이 돌아 한 번 사 먹어 보기로 했다. 안 사 먹은 지 제법 된 것 같은 참치김밥으로다가.
그러나 그렇게 기대해서 받아본 김밥은 '냉동식품'이었다.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전자레인지에 1분 정도 돌려서 데운 후에, 그걸 또 식혀서 먹는 게 정석이라는 친절한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다만 문제는 우리 집에는 전자레인지가 없다는 것이다. 원래 사용하던 전자레인지가 수명이 다된 후 그의 강력한 주장으로 전자레인지 대신 비슷한 크기의 오븐을 산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이걸 그러니까, 전자레인지 대신 오븐에 '구워' 먹어도 되나? 인터넷 몇 군데를 찾아봤지만 오븐과 전자레인지는 음식물을 데우는 방법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안 된다는 답변만 올라와 있었다. 다소 떨떠름한 기분으로, 나는 김밥을 한나절 정도밖에 내놨다가 자연해동이 되면 먹기로 했다. 어차피 안내문에도 전자레인지에 데운 다음에 식혀서 먹으라고 해놨으니까 그게 그거겠지 하는, 내 특유의 '나 좋을 대로 생각하기' 스킬을 십분 발휘해서.
그러나 한나절 정도 밖에 내놨다 먹어본 김밥은 대실패였다. 속재료까지 갈 것도 없이 김 속에 말린 밥이 죄다 한 덩어리로 엉겨 붙어서 먹을 수 있는 고무에 둘둘 말려 있는 참치를 씹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돈 주고 산 것 버릴 수도 없고, 그 김밥 한 줄을 꾸역꾸역 집어먹는 내내 툴툴거렸다. 처음엔 '뭐 이런 걸 사람 먹으라고 만들어서 파냐'는 식이었던 그 투덜거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 사는 물건 제품 설명도 제대로 안 읽어보고 산' 나의 부주의함 쪽으로 타겟이 옮겨갔다. 사실 그렇다. 냉동식품이라는 사실만 알았더라도 그 김밥을 돈 주고 사는 모험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우리 집엔 전자레인지가 없고, 그래서 남은 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해 아직도 이틀에 한 번꼴로 밥을 하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터이니까 말이다.
그렇게 입맛만 잔뜩 버리고, 오랜만에 참치김밥 한 번 먹어보나 하고 기대했던 마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들시들해져 버렸다.기껏 생일 쿠폰까지 동원해서 할인 받은 금액만큼 고스란히 헛짓했구나 하는 생각에 입맛이 썼다. 내일은 좀 귀찮더라도 집 근처 분식집에 가서 사장님이 직접 말아주시는 참치김밥을 한 줄 사 먹고 입가심을 해야겠다. 그리고 앞으로는 냉동김밥 따위는 쳐다도 보지 말아야겠다. 적어도 전자레인지를 새로 사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