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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뭐 없지야 없겠지만 그리 많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햄버거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오후쯤 배가 출출할 때 허기를 달래는 간식으로는 꽤 쓸만한 물건이기도 하다. 다만 햄버거라고 다 같은 햄버거가 아니어서 내가 웬만해서는 쳐다도 안 보는 품목이 한 가지 있다. 치즈버거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에 한 번 크게 혼이 난 경험 때문이다.
엄마와 함께 할아버지 댁에 다니러 가던 길이었다. 휴게소에 들러서 요기도 할 겸 치즈 버거 하나를 사 먹고는 배탈이 제대로 나고 만 것이다. 요즘에야 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는 세계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고 심지어는 각 휴게소마다 유명한 먹거리까지도 있어서 별다른 용건도 없이 오직 그 음식을 먹어보러 무슨 맛집 투어라도 하듯 휴게소에 들르기도 한다는 모양이지만 그 당시의 휴게소는 시설도 열악했고 위생 상태도 엉망이었다. 아마 그 와중에 햄버거가 좀 상하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햄버거 속에 들어있던 피클에서 나던 유독 불쾌한 맛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니까. 너무너무 배가 아팠고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고속도로를 달리는 중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었고 나는 엉엉 울면서 다음 휴게소에 도착할 때까지 복통을 참아야 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갈 수 없는 고속버스와 치즈버거에 둘 다 학을 떼고 한동안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고속버스와의 화해는 꽤 빨리,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이루어졌다. 객지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설추석에 기차표를 끊는 것은 요즘 식으로 말해서 임영웅 콘서트의 티켓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금손이나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처음 두어 해 정도를 부질없이 시도해 보다가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선택지는 고속버스뿐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그 끔찍했던 기억에서 아직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어서 나는 고속버스를 탈 때는 타기 직전에 산 커피 하나나 가는 중간중간 갈증 날 때 마실 뿐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는다.
치즈버거의 경우는 그 후로는 그야말로 내 인생에 있어서 없는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햄버거를 사러 가면 언제나 더 맛있는 데다 그런 트라우마에 가까운 좋지 않은 기억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는 수십 가지의 햄버거가 가득한 중에 굳이 치즈버거를 사 먹을 필요가 없어서였다. 유독 치즈버거를 좋아하는 아이언맨이 치즈버거를 먹는 장면은 볼 때마다 아니 돈도 저렇게 많은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저딴 걸 먹느냐고 괜히 목에 핏대를 세우기도 했다.
미국 대선 결과 페이지를 조금 보다가, 간만에 햄버거나 하나 사다 먹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마침 집 근처의 햄버거 프랜차이즈에서 며칠 전 생일에 긴히 햄버거 무료 쿠폰을 하나 주기도 해서 그것도 언젠가 써먹어야지 하던 참이기도 했다. 이왕 걸음하는 김에 두 개 정도 사 와서, 하나는 오늘 먹고 하나는 내일 먹어야겠다 하고 다른 거 하나는 뭘 사 올까 고민하던 중에 할인 행사로 치즈버거를 싸게 판다는 배너가 올라와 있었다. 왜 하필이면 치즈버거람. 그러나 할인의 유혹이 워낙 강력해서, 나는 눈 딱 감고 못 이기는 척 실로 수십 년 만에 내 돈을 주고 치즈버거를 사 왔다.
금방 만든 햄버거는 따뜻했고 고소한 냄새도 났다. 한 입 크게 베어 물어보니, 그냥 '맛있었다'. 금방 구운 패티의 온기에 적당하게 녹은 치즈와 생양파의 맛,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클에서 그날 그 불쾌하던 맛은 역시 정상이 아니었던 거지 싶은 그런 맛이 났다. 뭐, 맛있네. 그렇게 멋대가리 없는 한 마디를 중얼거리고, 나는 그 대충만 생각해도 30년은 넘은 시간만의 치즈버거를 뚝딱, 아주 맛있게 먹어치웠다. 그리고는 할인하면 종종 사다 먹어야겠다는 생각까지도 했다. 이만하면 나와 치즈버거의 화해는 꽤 성공적이었던 셈이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만큼일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괜히 싫어하고 미워하고 꺼려하던 것들과 하나하나 화해해 가는 것도 꽤 좋은 삶의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제 치즈버거에게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