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1월 두 번째 주 목요일이 끝나고 나면 사방은 탄식과 한숨으로 가득하다. 나 시험 너무 잘 본 것 같고 평소보다 더 좋은 점수가 나올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이지 단 한 명도 없다. 심지어는 평소 보던 것만큼 봤다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찾기 어렵다. 모두 다 더러는 한숨을 쉬고 더러는 울먹이기까지 하면서 아무래도 시험 망친 것 같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얼굴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예전엔 그랬다. 그런 분들을 보면 딴에는 위로랍시고, 만약에 시험 성적이 생각만큼 잘 나오지 않아도 인생 거기서 끝나는 거 아니니 너무 좌절하지 말라는 말을 했었다. 내가 이맘때마다 늘 들먹이는 고 신해철 님의 어느 심야 라디오 방송에서의 멘트처럼, 대입 시험이란 끝나고 나서 10년만 지나고 나서 되돌아봤을 때 내 인생의 10대 뉴스를 뽑아 보면 그 말석에조차 들어가지 못하는 이벤트일 뿐이니 잘 쳤다고 너무 우쭐하지 말고 망쳤다고 너무 좌절하지도 말라는 말을 질리지도 않고 거의 몇 년째, 매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럴 일인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불쑥 들었다.
다 지나간 입장에서 보면 뭐든 별 것 아닌 일이 없고 뭐든 그때뿐인 일 아닌 것이 없다. 나만 해도 그렇다. 지금 생각해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건 2022년 4월 8일 오전 11시 30분경, 잠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그를 흔들어 깨우려다가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처음 발견한 그때 정도뿐이다. 그 외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이제 와서 되돌아보면 그거 뭐 별 것도 아닌 걸로 뭘 그렇게 울고 웃고 좋았다 슬펐다 했던가 하는 정도의 느낌뿐이다. 그닥 순탄하게 살아오지 못한 내 인생에 '큰 일'이 그가 떠나간 일 하나 뿐이지는 분명 아니었을 텐데도, 지나간 시간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은 처음부터 별 것이 아닌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별 것 아닌 것으로 변해가는 게 아닐까 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개학날 학교에 가서 과제물을 이것저것 내놓는데 수학문제를 풀어온 노트가 없었다. 집에 두고 왔겠거니 생각했지만 집 어디에도 그 노트는 없었다. 밤새도록 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노트는 마치 다른 차원으로 증발이라도 해 버린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그야말로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교무실로 수학 선생님을 찾아가서, 정말 맹세코 분명히 문제를 다 풀었는데 노트가 감쪽같이 없어졌고, 제가 하는 말이지만 제가 생각해도 변명같이 들리는 게 사실이니 벌을 주신다면 달게 받겠다고 더듬더듬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새빨갛게 상기된 내 얼굴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시더니 네가 거짓말을 하는 아이는 아니니 믿고 넘어가겠다고, 내 실수 아닌 실수를 용서해 주셨다. 거의 30년 가까이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았던 그 일은, 그러나 그 전날 밤 내내 뒤척이며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그런 식인 게 아닐까. 그 문제가 원래 별 것 아니었던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고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별 것 아닌 것으로 변해가는.
그래서 오늘, 인생의 첫 관문 앞에 서는(아닌 분들도 계시겠지만) 여러분께 그냥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으려고 한다. 잘 봤다 싶으면 그만큼 기뻐하고, 망쳤다 싶으면 기분 풀릴 때까지 힘들어하라고. 어차피 그 모든 과정은 옆에서 훈수 두는 사람 따위가 대신 겪어줄 수 없는 한순간일 뿐이니 좋으면 좋은 대로 힘들면 힘든 대로 그냥 담담히 그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라고. 다만, 수능이 끝나고 성적이 나오기까지의 한두 달은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홀가분한 시간이니 그 시간을 울적하게 보낸다면 그건 결국 본인의 손해일 뿐이라는 말까지는 덧붙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