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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Dec 28. 2024

케이크를 하나 더 사다 먹으면

-396

어릴 때 일이다. 아버지가 엄청 진지하다 못해 심각한 얼굴로 비밀 하나를 가르쳐주겠다고 하셨다. 그 비밀이란 "크리스마스와 1월 1일은 무조건 같은 요일이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정말로, 무슨 세계가 움직이는 원리 같은 거라도 알게 된 양 눈을 동그랗게 떴던 기억이 난다. 물론 단순히 12월 25일에서 정확히 일주일 후가 1월 1일이라는 걸 아는 지금으로서야 그냥 피식 웃으며 이야기할 법한 옛날 이야기일 뿐이지만.


딱히 교회나 성당을 다니지도 않는데도 크리스마스에는 케이크를 하나씩은 꼭 사다 먹었다. 특별히 무슨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 그냥 그 핑계를 대고 케이크를 사 먹는 것에 가깝긴 했다. 물론 여기에는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사려는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이 날의 케이크는 평소에 먹는 케이크에 비해 어딘가 좀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우리가 다녀본 그 숱한 빵집들 중 가장 케이크가 맛있는 집으로 선정해 두고 그의 생일이나 내 생일날마다 일부러 가서 케이크를 사 오곤 했던 서울의 한 베이커리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에 케이크를 살 것인지 그냥 눈 딱 감고 일주일 기다렸다가 그보단 조금 나은 1월 1일에 새해 기념 케이크를 사 먹을 것인지는 해마다 이맘때쯤 늘 그와 나의 입씨름 단골 소재이기도 했었다.


시국은 뒤숭숭하고 뭔가 기분 좋은 일은 도통 생기지 않아 기분전환이라는 핑계로 지난 크리스마스에 가장 작은 사이즈의 케이크를 하나 사서 이틀에 걸쳐 절반씩 먹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도통 크리스마스 기분은 나지 않았고 연말 기분은 더더욱 나지 않았다. 이제 사흘만 있으면 새해인데 하나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화가 았다가 어이가 없다가 기가 막히다가 다시 화가 나는 뉴스들만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그래서 이 때아닌 난리통은 언제나 정리된다는 건지 기약도 없고 뾰족한 해결책도 없어 보인다. 이런 대형 이벤트 따위 터트려주지 않아도 대개의 사람들은 다 사는 게 힘든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어서 탄식만 나오는 나날이 하루하루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 목하 고민 중이다. 그냥 눈 딱 감고, 새벽 3시부터 기다려서 오픈런을 해야 겨우 하나 사 먹을 수 있다는 대전 모 베이커리의 딸기시루까진 안 가더라도, 일주일 전에 사다 먹은 그 정도 크기의 케이크나 또 하나 사다 먹어 볼까. 그러면 좀 연말 같은 기분이 들려나. 아니 조금 전에 케이크 사다 먹었는데도 크리스마스 기분 같은 거 별로 안 나더라고 쓰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라도 뭔가 좀 기분이 좋아지는 이벤트가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찌꺼기마저 후후 불어 날려버린 듯 깨끗이 지워져 버린 올해의 연말과 크리스마스가 못내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난 아직 새해를 맞을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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