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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을 할 때는 집 앞 편의점에 가서 커피 하나를 산다. 이것은 일종의 루틴 혹은 버릇에 가깝다. 여름에는 빨대가 붙은 컵커피 음료를 사서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길에 쪽쪽 빨아 마시면서 간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찬바람에 노출된 손도 녹일 겸, 따뜻한 캔커피를 산다. 편의점 온장고 속에 들어있는 캔커피 중에 무엇을 살 것인가를 고르는 과정은 심플한 듯하면서도 좀 복잡하다. 내가 잘 사마시는 캔커피는 1200원 정도인데, 가끔 1, 200원 정도 더 비싼 대신 원 플러스 원 행사를 하는 커피가 있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소용이 소용이니만치 온장고에 넣은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커피가 충분히 따뜻하지 않다든가 하면 늘 사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사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어제가 좀 그런 날이었다.
늘 사던 커피들이 온장고에 넣은 지가 얼마 안 되는지 죄다들 미지근해서, 한동안 안 사 먹던 좀 연식이 오래된 캔커피 하나를 골랐다. 이 커피는 내가 기억하기로는 우리나라에 캔커피라는 물건이 처음 출시된 거의 1세대 제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에 함께 출시됐던 캔커피들은 이제 거의 다 단종되었지만 이 녀석 하나만은 아직도 꿋꿋이 판매되고 있긴 하다. 나에 비해 입맛이 까다로운 그는 이 캔커피를 '느끼하다'며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놓고도 밤늦게까지 뭔가 일을 해야 할 때가 있을 때는 꼭 집 앞 편의점에 가서 다른 것 말고 그 캔커피를 하나 사서 마시곤 했다. 다른 커피는 이제 뭐 마시나 마나 한 기분인데 이상하게 이 커피는 하나 따서 마시고 나면 잠이 좀 바싹 깨는 느낌이 든다고, 그는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별로 믿지는 않았다.
캔커피를 골라 계산을 하면서, 이제 추워질 일만 남은 날씨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가 편의점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근데 그거 아세요? 요 쬐끄만 캔커피에 든 카페인이 에너지 드링크에 든 것보다 훨씬 많대요. 나도 몰랐는데 알바하는 애가 그러더라고. 뭐 그러냐고 확인해 보니까 진짜지 뭐예요. 아닌 게 아니라 힘쓰는 일 하시는 분들이 이 커피 잘 사 먹어요. 왜 그런가 했더니 그래서 그런가 봐. 그 말을 듣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니까 요컨대, 밤늦게까지 뭔가를 해야 할 때 이 커피를 사 마시던 그의 선택에는 나름의 이유가 다 있었던 셈이다.
겨울의 따뜻한 캔커피는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빨리 따서 마시고 캔을 버려야 한다. 온기가 사라지고 식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캔커피는 손난로가 아니라 되레 손을 차갑게 만드는 물건이 된다. 차가운 겨울 마람에 식어버리기 전에 캔 커피를 따서 홀짝홀작 마시며 어쩔 수 없이 내 삶 여기저기 묻어있는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번번이 씁쓸해진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거니 생각은 하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