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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잠을 설친 것이 비단 나 하나뿐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날 새벽 다섯 시까지 유튜브를 보다가 소리만 켜놓은 채 깜빡 잠이 들었다가 30분 간격으로 잠들었다 깼다가를 반복했다. 그렇게 반쯤 밤을 샌 덕분에 한 달 반 가까이 계속되던 내란성 불면증은 이제 좀 그만해도 되게 되긴 했지만 그 여파로 어제 하루 종일을 빌빌거렸고, 급기야 오후 세 시가 넘어서는 도저히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지 못하고 아예 의자를 뒤로 젖히고 한숨 푹 잤다. 뭐 충분히 그럴 만한 날이 아니었나 생각하는 중이다.
거래처의 담당자 분과도 카톡으로나마 지난 한 달간 고생하셨다는 덕담 섞인 인사를 건넸다. 이제 30대 정도 되신 담당자분은 불쑥 그런 말을 꺼내셨다. 너무 창피하다고. 21세기 들어서 우리나라는 대통령 탄핵을 세 번이나 했잖아요. 첫 번째야 그렇다 치는데 두 번째 탄핵은 이제 10년도 안 됐잖아요. 그런데 또 이러고 있잖아요. 그게 너무 창피하고 쪽팔려요.
그래서 대답했다. 뭐가 창피하냐고. 세계에서 제일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은 건국될 때부터 민주주의를 한 나라이니 민주주의 역사가 대충 300년쯤 되는데,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부터 민주주의 했다고 쳐도 80년 정도고 그나마 군부독재 시절 다 빼면 아직 50년도 안 되지 않았냐고. 미국이 민주주의 한 시간의 5분의 1 6분의 1 정도밖에 안 되지 않냐고. 우리는 그러니까, 서른 살짜리 성인이 보기에 이제 겨우 다섯 살 여섯 살 먹은 유치원생인 거예요. 그런데 유치원생이 벌써 대통령 잘못 뽑았다고 지킬 거 다 지켜가면서 탄핵시키고 파면하고 오늘은 체포까지 했잖아요. 그게 얼마나 대단해요? 난 우리나라 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그런데 담당자분은 그 말을 듣고 한참이나 아무 말씀도 없으시더니 정말 그렇네요 하고 대답하셨다. 사실 말은 안 했지만 지난 한 달 내내 이 나라는 왜 이렇게 엉망인지, 이번에 이래 봐야 10년 후 20년 후에 또 똑같은 일을 겪게 되는 거 아닌지 하는 생각에 우울하던 중이었다고 했다. 왜 우리나라 국대 축구 잊을만하면 한 번씩 축구 망했다고 감독 짜르고 난리 치잖아요. 이래 가지고 월드컵도 못 나간다 어쩌고 그런 말 나오고. 그런데 가끔 유럽 쪽에 예선하는 거 보면 이탈리아나 스페인 같이 축구 잘하는 나라도 예선 통과 못해서 월드컵 못 나오고 그러거든요. 그런 거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가 축구 못하는 건 참 별 일 아니구나 싶은 이상한 안도감이 든다니까. 미국도 봐요. 몇 년 전에 그렇게 당해놓고 또 트럼프 뽑잖아요. 미국도 그러는데 우리나라가 이 정도 삽질하는 것쯤이야 뭐. 그런 말을 하다가 둘이서 한참 웃었다.
인터넷 어딘가에서 '남들 앞에서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클라이밍도 수영도 배우고 싶지만 못 한다는 분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게 어떤 건지 너무나 잘 알 거 같아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가끔 너무, 완벽하지 않은 스스로를 못 견디는 것 같다. 사실 남들도 다 그러고 사는데. 우리가 어쩌고 살든 남들은 의외로 그거 별로 관심 없는데. 그리고 사실 이만하면 꽤 괜찮게 하고 있는 건데도.
이만하면 잘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냥 그런 말씀을 드려 본다. 모든 독자님들과,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