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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다음 주면 설이다. 그리고 다음 주 월요일은 무슨 변덕인지 임시 공휴일로 지정이 된 모양이라 매주 월요일마다 하던 미팅은 간만에 한 주 쉬어가게 되어서, 잠시 짧은 방학을 앞둔 학생 같은 기분이 되었다.
미팅을 마치고 봉안당까지 찍고 시계를 보니 한 시가 넘어 있었다. 이럴 때 자주 가는 쇼핑몰 식당가에 가서 대충 밥을 먹고,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1층에 있는 인테리어 소품 매장에서 잠깐 아이쇼핑을 했다. 마트보다는 좀 덜하지만 이런 인테리어 매장도 사자고 들면 사고 싶은 것이 한도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지라 마음의 끈을 단단히 움켜쥐고 둘러보지 않으면 안 되긴 한다.
그 와중에 한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있었다. 조화 매대가 출입구 가까운 시즌 상품이 진열되는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하기야 옷이나 이런 인테리어 매장의 계절은 내가 실제로 살고 있는 계절보다 한두 칸 정도 먼저 가게 마련이니 이제 이 매장에서도 벌써 돌아올 봄을 겨냥한 상품들 위주로 매장 배치를 얼마 전 새로 한 모양이었다. 잠깐 보고 갈까. 그런 생각에, 한 바퀴 돌고 버스를 타러 나가려던 걸음을 돌려 조화 매대 앞으로 갔다.
갖가지 화사한 색깔의 튤립들이 눈에 띄었다. 거 참, 며칠 전 열린 판매에 튤립이 올해 첫 꽃으로 뜬 것을 보고 급 주문해 놓은 건 또 어찌 알고 튤립인가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그가 떠나고 난 후 꽃을 사다 꽂아놓는 루틴이 생겼다는 것을 아시는 지인 분은 그럴 거면 그냥 조화를 사다가 꽂아놓지 그러느냐고 말씀하신 적도 있긴 하다. 사실 조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편하다. 조화는 시들지도 않고 물을 갈아줄 필요도 없다. 내가 질리지 않는다면 몇 년이고 꽂아둘 수도 있다. 의외로 가격이 비싸긴 하지만 내가 그의 책상에 꽂아놓는 꽃을 위해 지출하는 돈을 생각해 본다면 그 편이 훨씬 경제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편리한 조화를 사다가 그의 책상에 두어야겠다는 생각은 지금껏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조화는 어찌나 잘 만드는지 안 만져보면 생화인 줄 알겠네 하는 찬사나 몇 마디 한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나는 실컷 눈요기만 하고 사지는 않고 그냥 조용히 매장을 나와 버스를 타러 갔다.
주문한 튤립은 아마 오늘 아니면 내일쯤 집에 도착할 것 같다. 길어야 2주일, 짧으면 일주일 남짓한 그 꽃들과의 시간을 위해서 나는 매일 아침마다 꽃병에 물을 갈고 줄기를 다듬고 시든 잎을 따내는 수고를 기꺼이 할 것이다. 그냥 왠지, 아직은 그를 위해서 이 정도의 성의는 남겨놓고 싶다. 그래야만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