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엔 파워 서플라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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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전자 제품이 고장 난다는 건 사람을 매우 당황하게 한다. 물건이라는 건 그게 뭐든 정해진 수명이 있고 또 그게 아니라도 이런저런 이유에 따라 얼마든지 고장 날 수 있는 것이지만 우리는 대개 그런 순간을 상정해 놓지 않고 살기 때문에 말이다.


어제 아침, 갑자기 컴퓨터가 켜지지 않았다.


아 또 왜. 대번 짜증을 더럭 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뭐 그래봤자 전원 버튼 몇 번 연타하면 알아서 켜지겠거니 하는 조금 나이브한 생각이 있었다. 컴퓨터에 관한 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그가 떠나가던 그 해 10월 달인지 어느 날 갑자기 컴퓨터 모니터가 시커멓게 죽어버려 켜지지 않아서, 집 근처 마트의 전자매장까지 가서 모니터를 사들고 들어오던 그날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모니터가 그새 또 고장 났을 리는 없으니 이건 그렇게 심각한 '고장'일 리 없었고, 아울러 그래서도 안 됐다.


그러나 컴퓨터의 파업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몇 번이나 전원 버튼을 눌러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아, 결국 나는 입이 한 발이나 튀어나온 채 책상 아래 있는 본체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원 버튼 뒤로 들어오는 파란 led 라이트가 깜빡거리고 있었고 띡띡거리는 불길한 소리만 날 뿐 전원 자체가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이런 거면 이건 단순히 윈도우가 깨졌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아, 큰일 났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주 오래된 유머 중에 컴퓨터가 켜지지 않는 증상은 여자들이 연애할 때 잘하는 '내가 왜 화났는지 몰라?'와 같은 뜻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증상이라도 그 원인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뭐 그런 뜻이다. 컴퓨터가 부팅이 안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켜지지도 않는다는 같은 증상을 놓고도 전원 케이블 문제일 수도 있고 파워 서플라이의 문제일 수도 있고 메인보드의 문제일 수도 있고 하드디스크의 문제일 수도 있고 전원 스위치 쪽의 문제일 수도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의 컴퓨터와 나의 컴퓨터는 같은 기종이다.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 케이블을 전부 뽑고 본체를 들어내 그의 컴퓨터 전원 케이블과 모니터에 물려 다시 부팅을 시도했지만 역시 증상은 같았다. 여기서 일단 전원 케이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오늘 하루를 그냥 버려야 할 스펙이었다. 드라이버를 가져와 케이스를 뜯어내 먼지가 자욱이 쌓인 본체 안을 대충 청소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메인보드의 배터리를 갈아보았지만 증상은 마찬가지였다. 이제 파워 서플라이의 문제 아니면 메인보드 문제, 둘 중 하나로 가닥이 잡혀가는 기분이었다. 전원버튼을 눌러보니 시스템 팬이 몇 바퀴 돌다가 멎어버리는 걸로 봐서 파워 서플라이 쪽 문제가 아닐까를 의심했지만 이건 사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내 희망사항에 가까웠다. 메인보드쯤 되어버리면 나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하루 이틀 작업을 못하는 것을 감수하고 수리를 맡겨야 하기 때문에 말이다.


사방에 전화를 돌려 겨우 파워 서플라이 파는 컴퓨터 부품점 한 군데를 수배했다. 버스까지 타고 가서 사 온 후에 오랜만에 보는 파워 서플라이 케이블을 뭘 어디다 꽂아야 하는지를 몰라 한참을 씨름했다. 가까스로 케이블을 제자리 다 짝 맞춰 꽂고 부팅을 시킨 후(그나마 이쯤에서 해결이 나서 천만다행이긴 했다) 비정상적인 종료를 몇 번 한 탓에 정말로 깨져버린 윈도우까지 복구하느라 점심도 못 먹은 채 다섯 시가 되었다. 어찌어찌 해결은 했다지만 그걸로 어제 내 하루는 고스란히 끝나고 말았다.


원래는 조만간 컴퓨터 본체를 한 번 바꿔야 하나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파워 서플라이 값이 5만 5천 원이나 나가 버려서, 최소한 1년은 더 버텨야 할 것 같다. 컴퓨터를 붙잡고 씨름하느라 배송 온 튤립이 소담스럽게 예쁜데도 별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또 내일 같은 평범한 하루는, 이런 식으로 박살이 나 봐야만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는 모양이다. 씁쓸하게도.


8ab932e38901b66810056fc6e67b47a9.jpg 이 이미지는 구글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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