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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때아닌 파워 서플라이 대란으로 본의 아니게 많은 일을 하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컴퓨터 책상을 청소했고 본의 아니게 컴퓨터 본체 내부의 먼지도 청소했으며(정말 이상한 일이다. 케이스를 꽉꽉 닫아두는 데다 내 책상에는 컴퓨터 본체 수납용 공간이 따로 있어서 문까지 늘 닫아두는데도 저 엄청난 먼지들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본의 아니게 윈도우도 다시 깔았다. 일단 컴퓨터의 전원이 무사히 공급되고 작동에 아무런 하드웨어적인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까지는 뭐 그럭저럭 좋았다 이거다.
일단 메인보드가 날아갔다든가 하는 금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감당이 힘든 지경까지 가지 않고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그쳐준 것은 참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무사히 새로 깔린 윈도우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나는 파티션이 나눠지지 않고 통째로 붙어버린 하드디스크를 보고 잠시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아니 이거 이래 놓으면 쓰는 거 영 껄끄러운데. 그러고 보니 윈도우도 이제 상위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을 조금 하고 있던 참이기도 했다. 그래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하루 정도 더 버리고 말끔하게, 그간 쌓인 작업 데이터도 백업하고 쓸데없는 것들은 좀 버리고 하드 디스크도 깨끗하게 포맷해서 파티션도 새로 나누고, 윈도우 상위 버전도 깔고, 새 pc 살 때까지 깔끔하게 정리해서 쓰자. 뭐 그런 원대한 계획이 분명히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구러 백업할 데이터와 폐기할 데이터를 가리는 데만 한 나절이 넘게 걸렸다. 백업할 폴더들을 정리해서 스토리지에 올려놓고, 이제 싹 밀고 다시 윈도우를 깔자고 생각했지만 대번 설치용 USB로 부팅이 잡히지 않는다던가 하는 소소한 문제가 잇달아 튀어나와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오후 3시쯤이 지나고 나니 내 얄팍한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 안 해. 안 해. 안 한다고. 분명 생각지도 못한 파워 서플라이 값 5만 원을 지출했으니 1년 이상은 더 써야 본전을 뽑겠느니 하는 말을 어제 한 것 같은데 또 이쯤에서는 슬그머니 '어차피 조만간 pc 바꿀 거니까' 하는 핑계를 대고는 대충 사는 대로 살자고, 마치 갑자기 자취방에 엄마가 찾아온 날 엉망진창으로 어지럽혀진 방 안의 잡동사니들을 침대 아래로 대충 밀어 넣는 기분으로 야심차게 시작했던 컴퓨터 정리 계획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정말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는 법이다. 처맞아보기 전까지는. 유명한 권투 선수인 타이슨이 했다는 이 말은 그러니까 원래는 저런 뜻이 아니라고 들은 것 같은데 그냥 저런 뜻이어도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맞는 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