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길면 꺾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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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컴퓨터가 때아닌 파업을 한 중에 집으로 배달온 튤립 이야기를 지나는 김에 잠깐 한 것 같다.


튤립은 내 체감으로는 아무 생각 없이 척척 사서 꽂아놓을 수 있는 마음 편한 꽃은 아니다. 생각보다 수명이 그리 길지도 않은 데다가 이미 몇 번 쓴 적이 있지만 단번에 꽃잎이 다 떨어지고 꽃줄기 위에 덩그러니 붙은 꽃술만 남는 최후도 제법 충격적이다. 그래도 그런 반면에 그 소담한 꽃의 모양이 워낙 곱고 예뻐서 잊을만하면 또 사다 놓게 되는 그런 꽃이기도 하다.


이번에 산 튤립은 다홍색에 가까운 오렌지색 튤립이다. 처음 집에 왔을 때는 꽃봉오리까지 시퍼런 색깔이 도는 데다 특유의 좁고 길다란 잎사귀까지 더해져서 꽃이라기보다는 무슨 대파 같은 채소 종류처럼 보였다. 가뜩이나 컴퓨터 때문에 머리가 아프던 중에도 택배를 받아 포장을 뜯고 튤립의 줄기를 다듬어 꽃병에 꽂아 놓았다. 그렇게 꽂아놓은 튤립은 이틀 정도가 지나니 완연히 피기 시작해서, 따뜻한 낮에는 꽃이 벌어지고 밤이 되면 마치 잠이라도 들듯이 잠시 봉오리를 닫곤 한다.


튤립은 상당히 키가 큰 편에 속하는 꽃이다. 그런데 그 긴 줄기에 비해 줄기 자체는 그리 단단하지 않아서 별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무난하게 줄기를 다듬어 꽂아놓을 수 있다. 꽃은 처음 사 온 줄기를 얼마만큼 잘라내느냐에 따라 대충 두고 볼 수 있는 기한이 정해진다. 줄기를 너무 짧게 잘라버리면 나중에 꽃병에 꽂기가 힘들어져서 꽃이 채 시들지도 않았는데도 버려야 하는 순간이 가끔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튤립은 아주 넉넉하게, 길이도 크게 자르지 않고 무성하게 돋아난 잎사귀들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살려서 꽃병에 꽂아 두었다.


컴퓨터의 말썽을 진압(했다기보다는 내 편에서 일정 부분 타협해 버린 쪽에 가깝긴 하지만)한 후 오늘 아침 튤립의 물을 갈아주려고 보니 열 송이 중 한 송이의 대가 눈에 띄게 휘어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휜 것이 아니라 꺾여 있었다. 튤립의 줄기가 꽃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제풀에 꺾여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점심을 먹고 나서 살펴보니 또 한 송이가 똑같이 꺾여 있었다. 아. 안 되겠다. 결국 나는 튤립을 다시 밖으로 들고나가, 오래 보고 싶은 욕심에 길게 살려두었던 꽃줄기를 거의 절반 가까이 잘라내고 이파리들도 거의 다 쳐냈다. 그러고 나서 꽃병에 꽂았다. 순식간에 키가 작아지고 무성하던 이파리마저 싹 잘려버린 튤립은 머치 길고 치렁치렁한 머리채를 어느 날 갑자기 단발로 싹둑 잘라버린 것 같은 모양이 되었다. 그래도 이미 줄기가 꺾여버린 두 송이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남은 여덟 송이 튤립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오래 보려는 욕심에 줄기를 그렇게 길게 남겨놓지 말 걸 그랬나 하는 후회를 뒤늦게나마 한다. 제대로 화분을 키우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물을 담은 꽃병에 꽃을 꽂아둘 뿐인데, 아직도 나는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것 같다는 생각도 좀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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