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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말로 설 연휴인데 올해는 설 준비라고 할 만한 것들을 아무것도 준비해 놓지 않았다. 있는 떡국에 있는 만두에 있는 사골국물로 설날 점심때쯤 그를 보러 잠시 다녀와 떡국이나 한 그릇 끓여 먹으면 그것으로 끝일 것 같다. 추석이면 그 핑계로 송편이라도 한 봉지 샀을 테지만.
다만 그렇다. 떡국은 다른 국들처럼 한꺼번에 서너 끼 정도의 분량을 끓여놓고 두고두고 먹기가 애매하기 때문에(하자면 못할 것도 아니지만 불어 터질 떡국이나 만두 등을 생각하면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다) 설날 당일 한 끼 밖에는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뭘 좀 해다 놓고 한 며칠 먹어보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경상도식으로 얼큰하게 끓인 소고기뭇국이나 또 한 냄비 끓여두고 몇 끼를 먹기로 했다. 소고기와 무는 좀 사야 하고, 때마침 냉장고 속의 대 파도 떨어져 가고, 겸사겸사 집 근처 마트로 갔다.
날이 날인 탓인지 마트 안은 카트를 밀고 다니기가 힘들 만큼 사람이 많았다. 그 안을 빙빙 돌며 원래의 계획대로 국거리용 소고기와 대파, 무를 샀다. 무의 경우는 조각무를 사면 딱 내 쓸모에는 맞았겠지만 손바닥만 한 크기의 조각무 두 개와 통으로 된 무 하나의 가격이 300원 차이밖에 안 나는 것을 보고는 도저히 조각무를 살 수가 없어 그냥 통으로 된 무를 하나 집었다. 여기까지만 하고 나갔어야 하는데, 언제나 그랬듯 이왕 왔으니 구경 좀 하다가 가자는 생각에 마트 안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고 내 카트에는 당초 살 계획이 별로 없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담기기 시작했다. 요즘 부쩍 맛있게 느껴지는 버터 쿠키라든가 다 쓴 것까지는 아니지만 딸깍딸깍 떨어져 가는 치약이라든가 할인 행사로 두 봉지에 2천 원도 채 안 하는 야끼소바라든가 변기 세정제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별다른 위기감도 없이 그런 것들을 눈에 띄는 대로, 주섬주섬 주워 담고 았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가만있자. 대충 계산해 본 카트 안의 물건 금액은 3만 원이 조금 넘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럴 거 같으면 그냥 2만 원 치를 더 사고, 급한 것 몇 가지를 빼고는 배송을 시키는 게 낫지 않나?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마트 안의 풍경이 순식간에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물건들이 사방에서 너도 나도 손을 흔들며 좀 사가라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사다 먹은 지 제법 된 것 같은 우동도 있었고 사다 놓으면 언제 써도 쓸 물티슈도 있었고 자몽 향이 나는 바디워시도 있었다.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면 그깟 5만 원이야 어렵지 않게 채우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불과 며칠 전에 온라인으로 마트 장을 한 번 봤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일부러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이미 몇 번이나 한 말이지만 마트라는 곳은 돈이 없는 게 문제지 살 물건이 없어서 문제인 경우는 절대로 없는 곳이기 때문에 말이다. 국거리 외에 담았던 것들도 다 제 자리에 갖다 놓을까 하다가, 그냥 딱 거기까지만 사기로 어렵사리 스스로와 타협을 봤다. 그렇게 계산한 총금액은 정확히 2만 9천 원이었다.
어차피於此彼라는 말은 한자어다. '이렇든 저렇든' 정도의 의미라고 한다. 이 말은 가끔 사람이 갖고 있는 선을 뭉개서 흐리게 만들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데 아주 탁월한 재주가 있는 것 같다. 소고기뭇국을 끓이는 데 필요한 것들은 만오천 원이면 충분했고 나는 거기서 한 번 '어차피'를 했기 때문에 정확히 그 두 배의 돈을 쓰고 오게 되었다. 내 '어차피' 한 번의 금액은 대충 만오천 원 정도인 모양이고, 그래서 두 번 정도를 말하면 배송이 가능한 5만 원이 되는 모양이다. 나름의 계획 하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이런 식으로 가지고 있던 나름의 선이 뭉개지고 흐려지는 건 좀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보면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물러나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