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성격이 바뀐 계기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소심함

by ㅇㅈㅇ

미국에서의 삶은 나를 점점 소심하게 만들었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걸까? ‘남의 집’에 산다는 건 늘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다. 주류가 비주류에게 보내는 미묘한 시선과 무언의 압박 속에서 패배감을 느끼지 않기는 어려웠다.


어디를 가든 미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열에 여덟 아홉은 친절해도 한두 명은 무례함을 넘어선다. 인종차별을 한 번 겪고 나면, 인종차별이 아닌 것도 그렇게 보인다. 단순히 무례한 한두 명의 문제가 마치 모두의 문제인 것처럼 느껴지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중학교 때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수업에서 백인 여자 선생님이 내 에세이를 읽더니 다시 써오라며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왜 그렇게 화가 났던 걸까? 안 그래도 영어가 서툴러 조심조심 학교생활을 하던 나에게 그 장면은 너무 큰 충격이었다. 결국 친한 한인 친구의 부모님과 지인들을 대동해 학교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그때의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체육 수업 첫날, 락커룸에서 삼각팬티를 입고 갈아입던 나는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때 나를 원숭이 보듯 바라보던 시선이 아직도 생생하다. 학창 시절, 점심시간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친한 친구가 몇 명 없었는데, 점심시간이 A, B, C 세 타임으로 나뉘면서 함께 밥을 먹을 친구가 없어진 것이다.


만약 내가 친구를 두루 사귀었다면 별문제 없었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수업시간에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도 점심시간이 되면 더 친한 친구들과 그룹을 이루어 갔다. 누군가 나를 불러주면 잠시 안심했지만, 그들 사이에서 공감할 수 없는 대화가 이어질 때마다 고립감을 느꼈다. 그들은 어젯밤 함께 보낸 시간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그 대화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영어에 대한 자신감 부족과 대화의 어려움 때문에 스스로를 피했던 것 같다. 성격상 철판을 깔고 실수를 감수하는 것이 힘들었고,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 두려웠다. 놀림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한 번은 용기를 내어 아는 얼굴들 사이에 앉았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이 녀석 뭐지?"라는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어버버하다가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너무 어려워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으로 향했다. 방과 후 활동에 참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결국 학업에만 매진한 나는 대학 입학 시기 큰 좌절을 겪었다.


미국에서는 누구나 언어와 문화 장벽에 부딪힌다. 그걸 극복하느냐 마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짓는다. 그래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고, 곁에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다. 어린아이가 낯선 곳에서 친구를 사귀고, 언어를 배우고, 학업을 따라가며 방과 후 활동까지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공립학교를 ‘야생’이라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 돈이 있으면 사립학교에 보내는 것이 좋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그 지옥 같은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한인 친구들 덕분이었다. 지금은 서로 연락이 끊겼지만, 당시 그들은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그 순간을 견디게 해준 존재들에 대한 고마움이 새삼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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