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성착취 혐의로 기소된 후 자살한 미국 재계의 거물 앱스틴의 수사파일
요즘 미국 정치의 핫이슈 중 하나가 '제프리 앱스틴 파일'입니다. 제프리 앱스틴의 이야기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Jeffrey Epstein: Filthy Rich, 2020)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을 정도로 미국에선 널리 알려져 있죠. 앱스틴의 기소 이후, 그의 파렴치한 성범죄에 동참했던 고객명단을 통해 미국 우파성향 음모론의 단골 소재였던 미국 엘리트 사회의 아동성착취 행태가 드러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제프리 엡스틴(Jeffrey Epstein)이 누구인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엡스틴은 월스트리트 출신의 억만장자 금융가로, 미국의 정치, 금융, 문화계에 걸쳐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며 영국의 앤드류 왕자(Prince Andrew, Duke of York), 전 미국대통령 빌 클린턴 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과 교류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성범죄로 기소되고, 수십 명의 어린 소녀들을 대상으로 한 그루밍과 이를 통한 성착취가 드러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죠. 특히 그가 소유했던 개인 섬 '리틀 세인트 제임스'는 '성노예 섬'으로 불리며 악명을 떨쳤습니다. 지난 2019년, 그는 구속된 상태에서 재판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이 죽음을 둘러싸고 많은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다시 엡스틴 파일로 돌아오자면,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 중에서도 가장 극우에 속하는 '큐어난(QAnon)' 지지자들은 정부 내부에 은밀히 존재하는 비밀세력 '딥 스테이트(Deep State)'가 미국을 조종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바로 이 딥 스테이트의 구성원들이 아동성매매 및 성착취 카르텔이라고 믿기 때문에, 앱스틴 파일은 곧 '딥 스테이트'의 실체를 폭로하고 파헤칠 결정적인 증거였죠.
큐어난 지지자들은 딥 스테이트를 폭로하고 처단할 인물로 트럼프를 지목하고 맹렬히 지지했습니다. 헌데 트럼프는 재집권 후 관세나 인사조치로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으면서도 앱스틴 파일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죠. 그러던 중 법무장관으로 임명된 팸 본디(Pam Bondi)가 뉴스 채널 진행자의 질문에 "(앱스틴 고객 리스트가) 지금 내 책상 위에 있다"라고 말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객 명단'은 없다고 바로 말을 바꿨죠.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고, 트럼프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거대한 음모론의 궁극적인 증거라고 지목하던 파일을 이제와 없어서 공개 못한다고 하고 넘어가기는 쉽지 않겠죠. 트럼프는 이러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버락 오바마가 부정하게 선거에 개입했다는 등의 여러가지 이슈를 급조하기도 하고, 팸 본디에게 앱스틴 기소 관련 서류의 공개를 법원에 요청하도록 명령하는 등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지만 앱스틴 이슈를 완전히 잠재우기에는 부족해 보입니다.
만약 고객 리스트가 없다면 없는대로 모든 자료를 투명하게 공개한다면 문제가 해결될텐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요?
사실 앱스틴 파일이 트럼프에게 직접적으로 큰 해를 끼칠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앱스틴과 그의 관계는 이미 잘 알려져 있고, 그의 지지자 사이에서 트럼프는 청렴하고 고고한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죠. 지난주 보수성향의 월스트리트저널에서 트럼프가 앱스틴의 50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보냈다는 생일카드의 내용을 보도했지만, 반응은 미적지근했습니다. 직접 그린 나체 여성과 함께 '하루하루가 또 하나의 멋진 비밀이 되길 바라(may every day be another wonderful secret)'라는 매우 수상쩍은 메시지를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사실 돌이켜 보면, 첫 대선 때 트럼프의 여성 비하 내지는 성추행을 정당화하는 듯한 발언(grab 'em by the pussy)의 녹취 스캔들 또한 남자들끼리 모여하는 음담패설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간 이력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지지층의 불만을 감수하는 이유를 생각해 봤습니다. 만약 앱스틴 파일이 진짜로 사탄 숭배 의식을 벌이는 정계 엘리트의 모임을 폭로하는 내용이라면 트럼프에게는 크게 이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기존의 부패한 정치인들과 차별화된 성공한 비즈니스맨의 이미지로 자신의 파격과 일탈을 합리화하던 트럼프로써는 당연히 지지층을 더 결속시킬 이야기겠죠.
하지만 그냥 돈 많고 변태 성욕을 가진 늙은이들의 모임이라면 어떨까요? 만약 앱스틴 고객의 대부분이 정치 권력과 큰 인연이 없는 부자들, 성공한 사업가나 자산가로 채워져 있다면 말이죠. 그러한 부류들과 자신의 이름이 함께 거론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을까요?
트럼프는 자신의 잇속과 생각을 세상에 알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를 타인에게 강요하는데 대단히 유능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공개를 꺼리는 사실이란 어떤 것일까요? 당연히 자신의 이익과는 상반된 진실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