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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비 글라스 May 06. 2020

상처

상상 에세이

나에게는 오래전부터 만나고 있는 여자 친구가 있다. 그녀는 웃을 때 눈이 옆으로 자연스럽게 퍼지면서 눈 아래의 애교 살이 살짝 도드라진다. 대학시절에 캠퍼스 커플이었던 우리는 수업이 끝나거나 공강이 되면 캠퍼스 안의 분수대를 돌며 그녀가 좋아하던 아메리카노를 마시곤 했다. 함께 웃으면서 다음 수업을 수강하러 다른 건물까지 데려다줄 때 잠깐씩 그녀와 건넨 농담이 공부를 하느라 받은 스트레스를 녹여주었다.

 

그녀는 주로 컨버스 운동화를 신었다. 발이 선천적으로 약해 딱딱한 구두를 신으면 발이 쉽게 굳어지고, 여기저기 생긴 물집과 상처로 며칠 동안 고생을 했다. 그래서 취업 면접으로 구두를 신는 날이면 내가 학교 근처 버스정류장으로 데리러 나갔고, 뒤꿈치에 피가 나 절룩거리는 그녀를 업고 기숙사로 향했다. 

    

경영학과 졸업반일 때 그녀는 중간 정도 규모의 기업에 취업을 했다. 우리는 둘 다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학원도 거의 다니지 못하고, 열심히 공부를 해서 높은 레벨의 학교에 입학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비교적 안정적인 회사에 취업을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그녀의 취직이 반갑기만 했다. 학생이라 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번 돈을 쪼개어 취직 축하선물로 수제구두를 샀다. 발 때문에 매번 힘들어하던 그녀를 위해서 어느 여대 앞의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수제구두 가게에 가서 신발을 맞췄다. 평소에 학생 과외를 해서 번 용돈을 매번 나의 밥값과 책값으로 쓰던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까울 것이 없었다. 나중에 취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면 꼭 더 좋은 것을 준다고 다짐했었다. 다만, 욕심이 있던 내가 5급 행정고시 준비를 하느라 데이트도 예전처럼 많이 못하고, 강의비, 교재비 때문에 돈도 없는 취업준비생이라는 것이 그저 미안했다. 첫눈이 오는 날을 기대하던 그녀였는데 정작 첫눈이 오는 날이 나의 행정고시 전 날이라 만나지도 못했다. 그게 마음에 남아서 공부하면서 ‘빨리 합격해서 같이 꼭 놀러 가야지. 그때는 발 아프지 않게 차도 사서 실컷 드라이브도 시켜줘야겠다.’라고 혼자 말했다. 여자 친구는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날이면 내 학원비의 일부도 지불하고, 굶으면서 공부하지 말라며 내게 용돈도 줬다. 그녀의 생일이나 우리의 기념일에도 잠깐 얼굴만 보고 다시 학교 도서관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 후 사계절이 지났고, 예전부터 몇 번의 도전과 실패의 반복 끝에 내게도 드디어 합격의 순간이 왔다. 그녀는 나보다 더 기뻐하며 축하했고, 아버지는 고생한 나를 자랑스러워하시며 평생 일하다가 퇴직할 때 받은 퇴직금의 일부로 소형차 한 대를 사 주었다. 그것으로 여자 친구와 오랜만에 데이트도 하고 오라고 했다. 나는 사실 차가 반가웠지만 합격자 대상의 연수원에도 가야 하고, 그곳에서의 적응이 더 시급해서 결국 데이트는 나중으로 미뤄야 했다.      


연수원에서의 합숙 기간 동안 나는 그 안에서의 새로운 경쟁사회에 진입했고,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느라 거의 그녀의 연락도 밤늦게나 한 번씩 확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처음 며칠은 잘 이해해주었지만, 그것이 장기간에 걸치자 조금씩 실망하는 것도 수화기 너머로 느껴졌다. 


연수원을 마치고 드디어 시보기간이 되어 발령받은 기관에 갔다.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출근길이 신이 났다. 그리고 건물로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태극기가 눈에 들어올 때면 괜히 애국심이 생기고, 사무실에서 일을 잘 배우기 위해 집중을 했다. 내게는 새로운 세계였다. 설레는 마음이라 그곳에서 열심히 일해서 인정도 받고 싶어서 더 열정을 다했다. 처음이라 신입 환영 의미의 회식자리도 있었고, 출장을 갈 일도 생겼다. 그런데다 적응을 위해 야근을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그녀에게 온 메시지에 10시간쯤 후에 답장을 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났다. 일을 할 때는 그것에 집중하고, 긴장하느라 그녀 생각이 나지는 않았다. 일이 끝나고 녹초가 되어 집에 와서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면 몇 개나 떠 있었다. 새벽이 되기 직전에 겨우 씻고 전화를 하면 그녀는 이미 화가 나 있었다. 일하는 것도, 바쁜 것도 이해는 하지만, 하루 종일 전화도 없고, 답장도 없다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내게 따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냥 쉬고 싶었다. 아무 소득 없는 싸움을 하기보다는 내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자고 싶었다. 여자 친구가 왜 내 이런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할까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한 달쯤 되자 이제는 매일 밤에 싸우고, 해명하느라 바쁜 우리 모습에 나도 지쳐갔다.      


연수원에서 같은 팀으로 수행과제를 했던 다른 신입이 있었다. 나와 같은 기수 합격생이었다. 그때는 그냥 동기가 생겨서 의지도 되고, 모든 과제 수행에 능했던 그녀가 믿음직했다. 내가 배치된 기관에 첫 출근을 하자 사무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나를 보고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새로운 그곳에서 처음으로 듣는 밝고 익숙한 목소리였다.      

어느 날 나와 그녀는 함께 출장을 가게 되었다. 관용차를 내가 운전해서 함께 가는 길에 내비게이션을 틀어놓고 처음 길을 나서는데 그녀가 내 옆 보조석에서 헷갈리는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순조롭게 도착했고, 계획대로 방문한 기관과의 협조 요청과 회의를 잘 마칠 수가 있었다. 나는 여러모로 고마워서 그녀에게 밥을 한번 사겠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일이 잘 끝났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가벼웠고, 그녀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며 데이트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말이 되어 여자 친구와는 잦은 싸움으로 냉전 중인 탓에 동기생인 그녀와 만나서 지난번에 사기로 했던 밥을 사 주었다. 주말에 둘만 따로 만나니 뭔가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괜히 설렜다. 날씨도 맑고, 봄기운이 완연해서 공원을 같이 산책하는 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내 마음을 잘 이해해주고, 내 말에 잘 웃어주었다.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저녁이 되자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면서 집 근처 놀이터에 있는 벤치에 잠시 앉았다. 같은 부서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녀와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듯 우리만의 암호 같은 농담이 있었는데, 그날도 그 말을 하며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마치 사랑을 시작하기 전 단계 같아서 나도 기분이 이상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여자 친구가 마음에 걸렸다. 늘 고맙고 미안한 그녀에게 합격 후에 밥도 제대로 못 사주고, 데이트도 못하고, 차를 샀는데도 교외로 드라이브 한 번을 못 간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속상했던 마음을 풀어주려고 재킷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나는 화면을 보고 놀라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 전화기 속 통화기록에 찍혔던 여자 친구의 부재중 전화번호로 잘못 눌러졌었는지 1시간째 여자 친구와 통화 중인 상태였다. 도대체 그녀가 어디서부터 연수원 동기와 나의 대화를 들었을까……. 내 몸은 순식간에 굳어져 그대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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