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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이비 글라스 May 07. 2020

제발 잊어주세요

상상 에피소드

수진이는 모처럼 주말에 약속이 생겼다. 오랜 솔로 생활 끝에 드디어 친구 지영이의 소개로 만난 태형이와 연락을 하면서 그와 영화를 보기로 약속을 하게 되었다. 

태형이는 수진이가 평소에 좋아하는 이상형이었다. 178cm의 키에 호수같이 맑고 큰 눈을 가진 하얀 피부의 대학생이었다. 물론 그의 외모도 그녀의 마음에 들었지만 목소리도 중저음이고, 노래도 잘 불렀다. 게다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전교 1등을 하였고, 학생회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물론 그가 의과대학생이 되면서 많은 양의 공부를 해야 하다 보니 연애를 할 시간조차 없었다. 방학이 되어 겨우 시간을 내어 어린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 지영이에게 수진이를 소개받게 되었다.      

수진이는 성격이 밝고 평범한 성적의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지영이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친해진 친구다. 햇볕이 뜨거운 어느 여름날 수진이가 다니던 학교에 지영이가 전학을 왔다. 담임선생님은 지영이를 수진이 옆자리에 배정해주셨다. 그녀는 단발머리의 30대 후반인 농담도 잘하고, 학생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성격이 좋은 선생님이었다. 


그렇게 지영이와 수진이의 어색한 인사 후에 5교시쯤 체육시간이 되었다. 173cm의 키에 구릿빛 피부와 다부진 어깨를 가진, 호탕한 성격으로 인기가 많은 20대 후반의 체육선생님은 갑자기 교실에 오시더니 

“오늘은 미세먼지 수치가 높아서 1층 실내 강당으로 모인다!”

하고 공지를 했다. 실망한 학생들의 투정 섞인 반응을 뒤로하고 강당에 모인 학생들에게 하얀색 공 하나를 던지며 

“피구 하자! 저번처럼 두 팀으로 나누고, 전학생 김지영은 수진이 팀으로 간다. 시작!”

수진이는 공부는 잘 못해도 체육시간은 재미있었다. 어려서부터 구기종목은 거의 다 자신이 있었다. 손목의 힘이 다른 학생들보다 세서 오늘같이 피구를 하는 날은 팀을 승리로 이끌어 인기가 있었다. 수진이가 상대팀 선수들을 다 공으로 맞혔고, 지영이는 자신에게 공이 오면 수진이에게 자연스럽게 패스했다. 몇 번을 그렇게 호흡을 맞추고 나니 어느새 수진이의 팀이 이겼다. 지영이는 기뻐하면서 수진이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렇게 친해진 이후로 대학생이 되어서까지 우정이 이어졌다.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라고 부모님끼리도 친해서 태형이와 지영이는 비밀도 공유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지영이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바빠진 태형이가 안쓰러웠다. 

“그렇게 공부만 하지 말고 방학이니까 이번 주말에는 내 친구 수진이랑 같이 만나. 정말 괜찮은 애야.”      

그들의 소개팅 전, 수진이는 지영이에게 소개받을 태형이의 SNS에 들어가 봤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다. 물론 자신이 좋아하는,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그녀가 중학생 때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동네에서 가장 큰 스튜디오에 갔을 때였다. 건물 밖에 걸린 어떤 훈훈한 가족사진을 보고 한참 동안 응시했었다. 

‘잘 생겼다.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걸 보니 똑똑하겠지. 피부가 하얀 데다 미소 짓는 모습을 보니 인기도 많겠네.’

하면서 잠깐 동안 그와 친해지는 상상을 하면서 웃음지은 적이 있었다. 그 후로 매일 그 길을 일부러 돌아서 가야 하는데도 지나쳐 갔고, 괜히 그 사진을 보고 

‘아직 있네. 다행이다. 사진 바꾸지 마세요. 아저씨.’

했었다. 그래서 수진이는 SNS에서 태형이의 사진을 보자마자 반갑더니 5분쯤 뒤부터는 괜히 설레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영이가 고마워지면서 평생 잘해줘야겠다는 결심까지 했다.   

  

그렇게 해서 수진이와 태형이는 처음 만났고, 연락을 주고받다가 주말에 첫 데이트를 하기로 한 거였다. 약속을 하고 나니 수진이는 갑자기 태형이가 자기를 안 좋아할까 봐 걱정이 됐다. “그래! 급 다이어트를 하자. 역시 다이어트가 최고의 성형이지. 난 천재야.”

그날부터 약속한 날까지 3일이 남았다. 그동안 거의 물만 먹고 집 앞 동네를 뛰어다니며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화장도 잘 먹어야 하니까 얼굴에 수분팩도 붙였다. 그리고 이 옷 저 옷을 입어보며 거울을 거의 백번 정도 봤다. 그러는 사이에 살이 3kg 정도 빠졌다. 그렇게 안 빠지던 볼살도 이제 좀 줄어든 것 같았다.   

   

드디어 약속한 시간이 되었고, 태형이는 수진이를 보고 “살이 빠진 것 같아요.”하면서 인사를 했다. 수진이는 태형이와 함께 영화상영관으로 입실했다. 태형이는 센스 있게 커피를 사 왔고, 수진이는 영화를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커피를 마셨다. 어제부터 공복 상태를 유지해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기분이 좋았다. 


영화가 중간쯤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주인공이 자신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몰래 잠입해서 도청장치를 통해 상대방의 대화를 엿듣는 장면이 나왔다. 내용상 주인공이 집중을 해야 하는 장면이라 조용했다. 

“꼬르르륵......” 

불까지 꺼져있어서 관객들의 집중이 그 장면에 쏠려있었을 그때 하필이면 수진이의 배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 시간 공복을 유지한 데다 커피를 마셨으니 더더욱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제발, 시끄러운 장면으로 바뀌어라.’

수진이는 초조했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태형이는 계속 영화에만 몰입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몇 분 정도 총성이 울리며 영화가 고조되었고 

‘휴……. 다행이다. 들었나? 설마……. 아……. 어떡해.’

하며 넘어가려는 찰나였다. 


“꼬르르륵. 꼬르르륵. 꼬르르륵......”

이제는 배에서 점차 더 큰소리가 났다. 그때 주인공과 출연자들이 중요한 회의를 은밀히 하는 장면이라 개미가 지나가는 소리조차 없을 때였다. 

‘아......! 망했다. 제발 시끄러운 장면 좀 나와줘. 신이시여. 제게 대체 왜 이러십니까. 제발 배가 멈추든 암살 장면으로 바뀌든 어떻게 좀 해주세요. 프리즈......’ 

그토록 원하던 총격씬은 나중에서야 나왔고 그마저도 무소음 총을 쏠뿐이었다.   


영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지만 수진이 태어나서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태형의 기억에서 오늘 일을 지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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