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감상
우리 엄마는 별명이 있다. ‘웃음천사’이다. 전에는 별생각 없이 엄마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자주 웃으니 생긴 별명이겠거니 했다. 그렇다. 엄마의 직장에서나 가까운 지인들에게 그녀는 항상 웃고 있었다.
어느 날 엄마와 교회에 갔는데 어떤 분이 그녀에게 ‘웃음천사’라고 불렀다. 나는 그때 엄마를 보며 ‘사람들에게 늘 밝게 웃으며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엄마와 가족으로서 지금까지 수십 년을 함께 지내며 살아왔다. 어려서부터 나에게 엄마는 산처럼 큰 존재였다. 그녀는 나를 낳아서 키우는 동안 내가 약해지려고 할 때마다 강하게 견딜 수 있도록 나를 훈련시키곤 했다. 그래서 어릴 때 나는 엄마가 강하고 무서운 존재라고 느낄 때가 많았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와 살다 보니 겁이 많고 예민한 성격인 나에게 꼭 필요했던 과정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상처 같은 것을 별로 받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저 강한 엄마에게서 성장하느라 마음이 유약한 내가 받았던 상처만 떠올리며 한때 엄마를 원망하며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며 집에서 독립해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리고 그 원망 섞인 마음이 나중에는 눈덩이처럼 커져 그녀에게 내가 따지고 싶었던 말들을 조목조목 적어서 공격하기도 했다. 나중에 가족들에게서 들었지만 그 당시 엄마는 매일 자신을 탓하며 눈물을 흘렸단다. 그때 나는 어리석게도 그것이 엄마의 가슴을 찢는 것인 줄을 몰랐었다. 엄마는 강하니까 내가 받은 상처만 생각하면서 그녀를 공격해도 괜찮은 줄 알았었다.
그중에 떠오르는 말이 ‘엄마가 돈 벌러 나가 있는 동안 어린 나이였던 나는 혼자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와야 해서 불안하고 외로웠다’며 따졌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내 치아가 돌출이 되자 내가 매일 입을 손으로 가리고 다니는 것을 보고 치과 치료를 받지 않으면 예민한 나이에 아이의 자존감이 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단다. 그래서 치료를 받게 하고 싶은데 병원비가 너무 비쌌다. 교사였던 아버지의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치료비를 낼 수가 없어서 엄마가 돈을 벌러 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멀리까지 일하러 나가다가 팔에 오십견이 걸리고, 자궁적출 수술까지 받게 되었었는데 나는 그저 마음이 외로웠던 내 생각만 했었다.
몇 년 간의 방황을 끝내고 빈손으로 몸에 병만 얻은 채로 집에 돌아온 나에게 엄마는 아무런 따지는 말없이 조용히 내 방으로 안내했다. 돌아와서 본 내 방은 아직도 내가 떠나기 전 모습과 똑같았다. 다만 엄마가 내게 언행을 조심하는 것이 느껴졌고, 집에 있을 때 허무한 무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예전과 다른 점이었다. 내가 자존심만 세우며 재취업을 위해 도전해야 한다고 공부하던 때도 엄마는 나를 믿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공부하는 나를 위해 매일 도시락을 2개씩 싸서 도서관까지 무거운 책을 차로 실어다 주었다. 시험 날이 되면 혼자 나를 위해 기도를 하며 기다리다가 지쳐서 돌아온 내게 닭볶음탕을 해주곤 했다. 지금도 나는 닭볶음탕만 보면 그때가 생각이 나고 허기진 내 배를 채워준 따뜻함이 기억나서 좋다.
얼마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녀는 엄마를 키우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했었다. 그렇기에 엄마는 외할머니를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든 해 드리려고 했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빈소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그때 엄마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늘 웃고 있던, 강하고, 어떤 일에도 의연하게 대처했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엄마를 잃어서 두려움에 떨며 울고 있는 어린아이 같았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엄마는 창밖을 보면서 눈가에 고인 눈물을 머금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내게
“나는 비가 오는 날이 좋더라. 하늘이 나 대신 울어주는 것 같아서 좋아.”
그랬다. 엄마는 그 후로도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가 종종 있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었는데.
어버이날이 되어 엄마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렸다. 엄마는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생각났는지 혼자 울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외삼촌과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따라 엄마가 더 생각이 난다. 그런데 이제 꽃 달아드릴 엄마가 안 계시네…….”
하며 눈물을 흘렸다.
다행히 밤이 되자 비가 왔다. 엄마를 위로해줄 비가 내렸다. 울고 싶은 엄마를 대신해서 울어주는 비에게 나도 고마웠다.
엄마는 요즘 내가 다시 건강해졌고, 하고 싶던 일을 하며 사는 것 같아 좋다고 말했다. 내가 행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곧 엄마의 행복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요즘 행복한데 엄마는 여전히 내 걱정이 많다. 엄마의 예전 웃음은 돌아오기가 더디다. 엄마는 이제 내가 행복하다고 말해도 믿지 않으시는 것 같다. 나뿐 아니라 동생까지 걱정하느라 웃음천사의 웃음이 돌아올 듯 말 듯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그런데도 직장에서나 지인들에게는 여전히, 아니 전보다 더 큰 소리로 웃는다. 나는 이제야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웃음소리가 클수록 슬픈 마음을 숨기려는 몸부림이라는 것을. 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에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직장에 출근했을 때 일에 몰두하고 더 크게 밝은 척하며 행동했던 기억이 난다.
작년에 아버지가 암 치료를 받을 때 엄마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의 곁에서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대했다. 아버지가 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을 당시 엄마는 울고불고 난리 치는 내게 침착하게 위로했다. 나는 그때도 역시 엄마는 강한 사람인 줄 알았다. 나중에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때 사실 아빠가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부터 걷고 있어도 발걸음이 안 디뎌지고, 먹는 것도 입 속에 들어가는 건지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서웠다. 나도……. 너희 아빠 없으면 나는 못 산다.”
나는 아직 자식이 없어서 부모님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살다 보니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힘들수록 더 웃고, 아파도 더 크게 웃어 보이며 곁에 있는 가족들이 힘을 낼 수 있도록 자신의 감정을 참았던 부모의 마음을. 나에게, 사람들에게 크게 우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던 엄마의 심정을.
오늘도, 지금도 엄마는 밝게 웃고 있다. 웃음천사처럼. 빗속에 숨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