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 에세이
삐리리릭……. 삐리리릭…….
알람이 울리자 눈을 비비며 시계를 본다.
시곗바늘이 오전 6시를 지나고 있다. 좀 더 이불속에 있고 싶었지만 내 방 건너편에서 엄마가 요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찌개가 보글거리며 끓더니 어느새 방 안으로 슬며시 스며들어온다. 서둘러 화장실로 가서 아직은 반쯤 감겨있는 눈꺼풀을 거울로 쳐다보다가 곧 수도꼭지를 튼다. 물이 아직 차갑다. 3초 정도 가만히 틀어놓고 있다 보니 조금씩 따듯해지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이 없다. 그냥 두 손으로 물을 가득 담아 얼굴에 힘차게 끌어온다. 그리고 칫솔을 집어 든다. 그때부터는 다음에 뭐할지를 떠올린다. 거울 속 내 얼굴을 보면서 이빨 구석구석을 닦고나 서 다음 순서인 옷 입기, 밥 먹기, 가방 챙기기 등을 머릿속에 그린다. 옷을 입고 나서 아침식사를 하려고 주방에 갔다. 엄마가 차려준 밥을 씹는 둥 마는 둥 먹다가 어영부영 식사를 끝내고 다시 양치를 한다.
그러는 동안 엄마는 내가 먹을 도시락을 싸서 현관 앞에 둔다. 나는 가방을 확인하고 후다닥 뛰어서 현관 앞에 놓인 도시락 가방을 낚아채듯 들고
“엄마, 저 다녀올게요.”
라는 말을 남긴 채 아파트 현관을 빠져나간다.
손목시계를 보고 안심하며 서 있다가 어느새 커다랗고 하얀 바탕색에 학원 이름이 크게 박혀있는 12호차가 내 앞에 멈췄다.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얼굴은 구릿빛에 짙은 쌍꺼풀이 있는 아저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내게 오늘도 인사를 건넨다. 나는 그제야 인상이 펴지더니
“안녕하세요.”
하며 매일처럼 중간 자리에 가서 창밖을 본다. 학원으로 가는 10분 동안 바깥 풍경을 볼 수 있는 기회다. 중간 자리에 앉기 시작한 건 단순한 이유다. 앞자리는 빨리 내릴 수 있지만 문이 열릴 때마다 바람이 들어와서 춥다. 뒷자리는 아무도 없어서 마음이 편하지만 내릴 때 가장 마지막에 내려야 해서 중간자리 중에 혼잡하지 않은 쪽에 앉았던 것이 어느새 익숙해져서 늘 그 자리에 앉게 되었다. 항상 지나는 가로등을 슝슝 지나치고 나서 일찍부터 출근하느라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 직장인들을 보다 보면 큰 사거리가 나오고 신호등 앞에서 아저씨는 천천히 정차를 한다. 나를 포함한 학생들은 다 왔음을 감지하고 부스럭거리며 가방을 들고 차 앞쪽으로 향한다. 내리는 우리를 한 명 한 명 인사하시며 웃고 있는 아저씨를 뒤로하고 신호등의 파란 등이 빨간색으로 바뀌기 전에 바쁜 걸음으로 건널목을 건넌다.
가는 길에 같은 반 친구를 만나게 되면 이름을 부르거나 손으로 어깨를 치며 함께 한 건물로 향한다. 유명 학원이 몇 개 있는 곳이어서 큰 건물에 7개의 층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다들 어디서 온 건지 건물 입구로 모여들고 있었다. 각자의 동네에서 내가 타고 왔던 것처럼 학원버스 각각의 호차를 타고 왔겠지…….
1층에서 잠시 숨 고르기를 할 틈도 없이 바로 등산 모드가 시작되었다. 왜냐면......?
그 건물은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어서 모두 계단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인데 학원 교무실과 교실은 10층부터 16층까지 위치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지금부터 하나다. 한마음 한뜻이 되지 않으면 10층까지 도달하기 전에 낙오자가 될 수도 있기에 서로를 격려하며 올라가야 한다. 나름대로 스텝을 유지하며 올라가야 끝까지 지치지 않고 오를 수가 있다. 서로 그 사실을 알기에 앞지르려 하거나 가다가 갑자기 멈추는 진상 행동은 하지 않는다. 크게 쌍욕을 먹을 수도 있으니까. 매일 그 계단을 오르며 친구에게 농담을 건네거나 잠깐이나마 고민을 말하기도 할 정도로 이제는 폐활량이 커진 느낌이 든다.
첫날 반 편성고사를 보기 위해 올라갈 때는 4층부터 목구멍에 피 맛이 올라오는 현상이 있었지만 1주일, 2주일이 지나 지금은 같은 반 친구와 여유 있게 수다를 나누고, 우정을 확인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은애야, 어제 C반에 진희랑 얘기 좀 해봤어?”
“응, 국사책 빌려달라고 했어. 근데 목소리가 저음이야. 대박! 얼굴도 지진희랑 똑같은데 목소리까지 완벽해.”
영어와 수학으로 이루어진 반 배치고사 결과에 따라 나는 얼떨결에 상위 반인 A반으로 편성이 되었다. 그런데 가끔씩 공통과목의 경우 B, C반과 함께 수강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마다 수업내용보다는 새로운 얼굴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날부터인가 내 뒷자리에 앉은 B반 학생이 내가 좋아하는 가수 세븐과 닮은꼴로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하얀 피부, 얇은 눈꺼풀과 귀엽고 도톰한 입술, 마르고 날렵해 보이는 몸과 턱 선이 세븐과 닮아서 목소리도 비슷할 거라 상상하며 혼자 세븐의 노래‘와줘’ 앨범을 CD플레이어로 듣는다. 아침에 친구들과 계단을 오르며 각자 좋아하는 애들의 안부를 체크하는 것이 공부만 하루 종일 해야 하는 일상에서의 몇 안 되는 낙이었다. 그가 어제 입은 옷 스타일, 사물함 앞에서 책을 꺼내는 모습, 점심밥 먹을 때 있었던 해프닝 등 주제는 매일 조금씩 다르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면 사물함이 있는 곳에 도착했고, 책을 꺼내 교실로 들어가 지정된 내 자리에 가서 앉으면 담임선생님이 간단히 출석을 체크하고 몇 가지 공지를 한 뒤 1교시가 시작된다.
쉬는 시간에 창가를 보면 늘 똑같은 회색빛 건물들이 서있다. 그렇지만 날씨나 햇빛의 양, 가게들의 소음은 다 달랐다. 나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친구들과 매점에 가서 커피나 떡볶이를 사 먹기도 했지만 가끔은 창밖의 일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비록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밖에 나갈 수가 없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미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놀러 가 있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린다. 그 벨소리는 언제 들어도 반갑기만 하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내 책상에 들어오더니 매점에서 산 스타벅스 커피 한 병이 놓였다. 나는 종종 있는 일이라 익숙한 듯이 고개를 든다. 내 뒤에 앉는 피부가 하얗고 공부를 잘하는 오빠가 사줬다. 앉는 자리도 붙어있고 매일 보는 사이라 서로 친해서 매점에 가면 주변 애들 음료수도 같이 사 와서 나눠주는 분위기였기에 여느 때와 같이
“오빠 고마워. 잘 마실게”
하면서 뚜껑을 연다.
나는 사실 카페인이 몸에 잘 안 맞는지 커피를 마시면 속이 쓰리거나 가슴이 마치 격렬한 비트의 힙합처럼 평소의 4배 정도 크게 쿵쿵 뛴다. 그런데 그 사실은 아무한테도 말하지는 않았다. 그냥 다들 커피를 좋아했고, 커피를 마시면 공부할 때 졸음을 방지할 수가 있으며, 집중이 잘 되는 효과가 있었기에 나도 별생각 없이 누가 주면 마셨다.
오늘도 그냥 한 입 마시고 외우던 영어 단어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노래를 틀어놓고 외우면 더 잘 될 때가 있었기에 나는 이어폰을 꽂았다.
여주인공이 병에 걸려서 죽는 내용인데 죽기 전에 사랑하는 남자와의 로맨스를 그린 영화‘국화꽃 향기’의 OST인 ‘희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 뒤쪽을 툭 친다. 돌아보니 매일 보던 장난기가 다분해서 평소에 농담을 많이 하는 친구였다.
“아, 왜?”
익숙한 듯 반응했다.
그는 똘똘하게 생긴 쌍꺼풀이 있는 큰 눈에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선한 얼굴을 가졌고, 피부가 하얀데 아토피를 앓고 있어서 눈꺼풀이 조금 붉었고, 눈을 깜빡일 때 눈꺼풀에 하얀 각질이 일어나 하얀색 가루들이 붙어 있곤 했다. 평범한 청바지에 자주 입는 체크무늬의 남방을 입은 채 내게 또 장난을 친다. 원래는 그와 친했고, 한 번도 그를 보고 멋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고민상담도 가끔씩 하기도 했었다. 그럴 때마다 장난을 치다가도 진지하게 내 말을 들어주고 조언도 해주고 위로도 해주곤 했다.
이어폰으로 듣던 ‘희재’를 배경음악으로 깔린 채로 마음이 울적해지더니, 하필이면 커피까지 마신 뒤라 심장 박동수는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 그가 내 앞에 서서 작은 입술로 뭐라고 말을 하는데 노랫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창가에서 커튼 틈 사이로 작은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어, 뭐라고......?”
그가 또 뭔가를 속삭이듯이 말을 한다. 여전히 안 들려서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그는 그냥 웃더니
“아니야.”
하면서 갔고, 다시 수업을 알리는 벨소리가 학원 전체에 울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