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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마발 Aug 26. 2021

Q1(Qualifying) : 무식해서 용감했다.

그냥 운전이 좋아서 3화

2021년 8월 21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목적지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남해의 한 펜션. 오후 5시쯤에는 도착해야 했고, 여유롭게 가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출발할 채비를 했다. 나의 앞날을 예견하듯 우중충하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씨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06시 27분. 모든 준비를 마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욱작가가 벤츠를 사면서 받은 벤츠 로고가 박힌 가방을 챙겨서인지 나의 아방이가 마치 벤츠 C클래스가 된 것 같다는 헛된 생각을 하며 서울을 빠져나가기 위해 차를 바삐 움직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닥칠 일은 상상도 못 했다.


06시 54분. 그동안 서울에서 빨빨거리던 짬 덕분인지 서울을 빠져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잠실 롯데타워를 지나 3번 국도를 타고 성남으로 향했다.


07시 30분. 경로를 설정하기 위해 차를 세웠다.

모터스포츠 대회 중 ‘월드 랠리 챔피언십(WRC)’라는 대회가 있다. 이 대회에 참가하는 경주차에는 2명의 드라이버가 탑승하는데 이때 조수석에 앉아 코스의 모양을 한 박자 빠르게 드라이버에게 읽어주는 ‘코-드라이버(Co-Driver)’라는 역할이 있다고 한다. 나는 이 날 코-드라이버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혼자서 여행을 떠났다 보니 운전을 하며 커다란 지도책을 볼 수 없었기에 매번 길을 찾기 위해 차를 세우며 시간을 허비해야 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3번 국도와 45번 국도 사이에서 깊은 고민 끝에 나의 대학시절을 보냈기에 익숙한 이천으로 향하는 3번 국도를 타기로 결정했다.


08시 19분. 휴게소는 고속도로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새 출발한 지 2시간이 되어갔고, 조금씩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때마침 응암 휴게소가 눈에 보였다. 지도도 다시 봐야 했고, 기름도 넣어야 했고, 밥도 먹을 겸 휴게소에 들어갔다.

있을 것은 다 있지만 아주 화려하고, 아주 깔끔한 고속도로 휴게소에 비하면 다소 아쉬움이 있는 휴게소였지만 국도에 이렇게 넓은 휴게소가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다. 휴게소는 역시 라면. GS25 편의점도 있어서 디저트도 깔끔하게 해치웠다.


고속도로 휴게소와는 닮았지만 느낌이 꽤나 다르다.
특별히 맛있거나 그런 건 없다.
이 기름이 그렇게 빨리 소진될 줄은 몰랐다.


09시 14분. 서울에서부터 타고 온 3번 국도의 여정은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에서 38번 국도로 길을 잘못 든 나의 실수로 인해 끝이 나고야 말았다. 지금 이 글을 쓰며 별생각 없이 3번 국도를 검색해보고야 알았다. 3번 국도만 쭉 타고 갔으면 남해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아, ㅆㅂ)


09시 22분. 길을 잃었으니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지도를 볼 때마다 느끼지만 지도로 길을 찾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것이었다.

몇 번 국도인지, 몇 번 지방도인지는 표지판을 통해 알 수 있었지만 몇 km를 달렸는지 몰랐기에 내가 현재 있는 곳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얼추 때려 맞추고 빙빙 돌아가곤 했다.

긴 시간 지도와 사투 끝에 37번 국도를 타고 괴산으로 가기 위해 어석리라는 곳으로 차를 돌렸다.


첫 길 잃음.


09시 44분. 빌어먹을 37번 국도는 보이지 않고 작은 시골마을을 빙빙 돌고 있었다. 드넓은 논이 펼쳐진 이곳은 흡사 미로 같았다.


길 찾기 참 어렵다.


09시 55분. 겨우 37번 국도를 탔다. 난 괴산으로 향하는 이 길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길로 기억한다. 평소에도 배탈이 자주 나던 나는 평화롭게 37번 국도를 달리던 어느 시점에 급똥이 마려웠다. 진짜 심각했다.

응암 휴게소 같이 휴게소가 있기는 했지만 고속도로만큼 자주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주유소나 편의점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다시 한번 길을 잃었다. 어딘지도 모를 산길을 하염없이 달렸다. 중간중간 나오는 집들을 지나치며 ‘죄송하지만 강도나 나쁜 사람은 아닌데 급똥이 마려우니 댁의 화장실을 잠시 이용해도 될까요?’라고 물어볼까 싶었고, 울창한 숲을 보며 ‘저 풀들이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려줄 수 있을까?’하는 상상도 해보았다.

하지만 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괄약근과 액셀을 밟는 발의 환상적인 호흡을 이어갔다.


힘겨운 싸움이었다.


11시 13분. 기적과도 같이 괴산에서 만남의 광장이 나타났다. 무려 비데까지 있는 쾌적한 화장실에 앉아 나는 다짐했다. 이 고마운 도시 괴산을 소개하러 기필코 다시 오겠노라고.


천국이 있다면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11시 31분.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517번 지방도를 따라 군자산을 넘어 속리산 국립공원을 통과하기로 했다.


이런 멋진 곳을 그냥 지나쳐야만 했다.


13시 27분. 속리산 국립공원을 지나 영동으로 향하는 19번 국도에 올랐다.


14시 00분. 영동 레인보우 광장에 도착했다. 이곳까지 오니 절반 정도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피곤하긴 했지만 부지런히 가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기에 커피만 잠깐 사고 빠르게 차에 올랐다.


14시 41분. 무주군에 도착해 37번 국도를 타고 덕유산 국립공원을 넘었다. 도대체 산을 몇 개를 넘는 건지 모르겠다.


산은 오르지 않고 볼 때가 가장 멋지다고 했다.


16시 19분. 59번 국도를 타고 산청군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오니 너무 힘이 들었다. 얼른 내비 찍고 갈까 싶다가 조금만 더 가면 도착이니 해보자 싶었다.


16시 59분. 20번 국도를 타고 지리산을 넘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운전하면서 사람들이 이래서 와인딩을 즐기는구나 싶었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것을 뚫고 즐기는 와인딩은 피곤했던 내 몸에 색다른 활력소를 느끼게 해 주었다.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을 넘으며 보았던 멋진 경치들도 마찬가지였다. 갈 길이 바빠 이것들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나는 저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와인딩이란 것은 참 재밌다.


17시 09분. 심신이 지쳐서인지 길을 잘못 들었다. 20번 국도를 타고 내려갔어야 했는데 방향을 잘못 잡아 그대로 지리산 휴게소까지 와버렸다. 빨치산 토벌 전시관이 있는 곳이었는데 이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에 결국 내비게이션 어플을 켜 펜션의 주소를 입력했다.


빨치산 토벌 전시관은 뭐하는 곳일까...? 궁금하다.


남해에는 오후 6시가 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연습 삼아 시작했기에 좀 더 일찍 내비게이션을 찍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여행이 끝나고 서울에 돌아와서 몸살을 앓았다. 제목처럼 나는 무식했다. 지도를 제대로 볼 줄 몰랐고, 사전조사도 전혀 하지 않았다. 내 몸상태에 대한 체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기에 출발을 할 수 있었고, 사진으로 모두 담지 못했지만 꽤나 멋진 풍경을 보았고, 재밌는 순간도 분명 있었다.

이번에 이렇게 연습주행을 해본 것이 참 다행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장면을 보여줄 수 있을지, 더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해보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정확히 언제, 어디를 갈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조만간 또 새로운 모험을 떠나보려 한다. 그때는 또 어떤 곳에 차가 멈출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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