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에서 28일차-2월5일 수요일
국어 둘째 동생과 느긋하게 일어나서 오늘 뭐하고 지낼지 상의를 해봤다.
먼저, 숙소 근처에서 밥을 먹고 포도뮤지엄으로 가기로 했다.
호스트가 알려준 식당 중에 동백키친이라는 곳이 숙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그곳에서 브런치를 먹고 뮤지엄으로 가기로 했다.
거주하고 있는 집들과 숙박용 집들이 혼재되어 있는 마을 안에 구옥을 리모델링했을 것 같은 식당이 있었다.
우리는 파스타와 돈가스를 주문했고, 사진 한 장 찍은 후 바로 흡입. 친절한 국어 동생은 돈가스를 먹기 좋게 잘라주었다. 집에 재워줬다는 이유로 동생이 자꾸 돈을 내서 동생이 화장실 간 사이에 계산하려고 하니, 벌써 계산했다고 한다. 내가 먼저 화장실에 간 사이에... 이런 젠장할~
든든하게 밥을 먹고 포도뮤지엄에 갔다. 이번 주는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이렇게 실내로 갈 수밖에 없다. 섭지코지에 있는 유민미술관, 도립 미술관, 본태 박물관 등 제주에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건축물 자체도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포도뮤지엄도 멋진 외관을 가질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너무 직육면체라서 살짝 실망했다.
인포에서 입장권을 구매하고 천천히 순서대로 작품들을 감상했다. 주제는 기억이었다. 여러 가지 감정을 일으키는 작품들 때문에 실망한 전시관 외관 따위는 잊어버렸다.
'기억'을 주제로 한 작품들 중에 첫 번째 공간에서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작가의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사진들이었다. 젊은 시절 조류 연구가였던 어머니는 아이가 되어서도 자연을 사랑하고 있었다. 장난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나의 엄마를 생각해 봤다. 치매는 아니지만... 몸은 노인이지만 마음은 점점 어린아이가 되는 우리 엄마... 엄마가 이만큼이라도 건강하게 살아계신 것에 감사했다.
여러 작품 중에서 에드워드 호퍼 그림과 비슷한 느낌의 여류 작가 정보영 그림들이 기억에 남는다. 빛을 이용한 '어떤 조망'의 작품들을 보면서 같은 공간도 빛의 밝기에 따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보이는지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에드워드 호퍼 그림을 보면 왠지 쓸쓸하고, 마음 한편이 스산해지는 기분이었는데 정보영 그림들도 그런 느낌이 들어서 그림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작품은 그림보다는 그 공간이었다. 빨간 벽 위에 걸려있는 만화 같은 그림들이 가득한 이 공간, 다양한 얼굴들이 그려져 있는데, 뭔가 삐뚤빼뚤한 눈, 코, 입이 그려져 있는 얼굴들, 설명을 보니 관람객 참여 작품으로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한 후, 다시 눈을 감고 그린 얼굴들이었다. 나와 국어 동생도 마련되어 있는 공간에서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눈을 감고 그리고 통 속에 넣었다.
먼저 나와서 기다렸던 나는 국어 동생이 다 그리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에 동생도 다 그린 것 같아서 물어봤다. '누구 그렸어', '보고 싶은 얼굴요. 헤헤', '언니는 누구 그렸어요', '난, 아버지'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진 속 지금의 나보다 더 젊은 아버지 얼굴만 알고 있지 내가 실제로 본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정말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이 아버지 얼굴인지 잘 모르겠다.
도립미술관보다 더 다양한 작품들, 하지만 기억이라는 주제로 통일된 작품들... 그리고 나를 감동시켰던 작품들.. 다양한 감정을 짧은 시간 동안 느끼게 했던 시간이었다.
포도뮤지엄 관람 후 오늘도 마트로 갔다. 나보다 일주일 늦게 한 달 살기를 시작한 다른 직장 동료샘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국어 동생과도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고 얼마 전에도 같이 만났기 때문에 셋이 한 번 더 모이기로 했다. 오늘의 저녁 요리는 사과 수육과 오이 탕탕이다.
만춘서점에서 산 'music for inner peace'에서 소개한 음악들을 플리로 만들었다. 저녁부터 밤까지 플리에 수록되어 있는 음악들을 들으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한 가지라도 좋아하는 것이 같다면 그 공감대로 몇 시간씩 얘기할 수 있다. 우리 셋은 공통적으로 여행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번 제주도 한달살기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여행이 좋았는지를 주로 이야기하면서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