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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Aug 26. 2020

좋은 경험은 취향이 된다.

아이가 흰 계란을 보며 물었다.

 

" 깐 거야? 안 깐 거야? "


5년 전이었다. 도쿄로 여행을 갔다. 미술관에 온 듯 곳곳에 개성 있는 그림들이 가득한 호텔을 좋아하지만 이곳에는 감각을 노크할 만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단정했다. 로비에 있던 화분들은 줄을 맞춰 서 있었고 레드 카펫은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깨끗함과 단정함이 주는 편안함에 모든 감각의 버튼은 꺼져 있었다.

한 때는 돋보이는 것이 좋았다. 아니, 여전히 좋기도 하다. 아우성치는 공간, 흥을 돋게 하는 음악들, 자극적인 음식들이 좋았다. 그것들만을 추구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를 만끽하고 지나오니 평온한 것들도 자연스럽게 좋아졌다. 지난날 심심해서 쳐다보지 않았던 평온과 편안함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맛이 있었다.

호텔은 집이 아니기에 또 하나의 이벤트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흘러 무색무취의 공간도 그만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단정한 곳에서 맞이한 직원들의 담백한 말도 좋았고 군더더기 없는 호텔 어메니티도 좋았다.

개운한 잠을 자고 조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시리얼과 우유, 주스, 소시지, 크로와상 식빵, 페스츄리, 하얀 계란 등이 있었다. 다 한 번쯤 먹어보아 아는 맛들의 행렬이었다. 기대감 없이 소박한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소시지가 굉장히 탱탱하네. 건강한 맛이야.

이 빵 뭐지? 결이 촉촉하게 떼어져

오렌지 주스는 착즙인가 봐........"


반숙인 흰 계란을 한 입 베어 물고 말을 잇지 못했다. 졸린 눈이 갑자기 기상했다. 아는 맛이 아니었다. 그동안 살면서 얼마나 많은 계란을 먹어왔던가? 새로운 계란의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반숙으로 조리를 잘해서 그런 것일까? 동그란 계란을, 이리저리 돌려봐도 늘 같은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고소한 노른자가 반은 익고 반은 흘러내렸다. 푸딩을 먹듯 쫀득했다. 흰자는 비린내 하나 없이 상쾌했다. 전에 먹은 소시지와, 빵, 주스 모두가 훌륭했는데 계란이 맛의 정점을 선보였다. 기대 없이 맞이한 조식은 어제 지인의 소개로 찾아 헤맨 돈가스 집보다 훌륭했다. 이 곳이 맛집이었다.


흰 계란을 편애하게 된 건 그때부터였다.


앉은자리에서 세 개를 연달아 먹었다. 더 먹고 싶었지만 그러면 몸의 위와 아래가 놀랄까 봐 멈추었다. 그 공간, 그 분위기에서 먹었던 계란은 인생에 새겨진 타투 같은 존재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흰 계란 사랑은 계속되었다. 마트를 갈 때마다 흰 계란을 찾았지만 어느 곳에도  찾을 수 없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장을 볼 때마다 만나게 되는 게 계란인데 그때마다 번번이 여행지에서 이별한 연인처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리움의 부피는 커져만 갔다. 그렇게 일 년이 넘었을 때였다. 드디어 마트에서 흰 계란을 만났다.


도쿄의 호텔에서 만난 그 계란이 아닌 것을 알지만... 감성은 늘 이성을 추월하는 법.

그때의 추억의 맛을 잊지 못해 흰 계란만 먹고 있다. 나는 미식가가 아니어서 섬세한 맛의 차이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 그저 흰 계란을 마주하면 그때의 기분을 만나는 것 같아 좋았다.

이런 추억이 없는 사람들에게 흰 계란은 홀대받았다. 늘 보던 복숭아빛 달걀만 잘 팔렸다. 낯설기 때문에 잘 선택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매출이 없으니 흰 계란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면 난 또 다른 흰 계란을 찾아 헤매었다.


한 번의 좋은 경험은 인생에 거쳐 함께 하며 취향이 된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탕후루를 접한 건 대만 여행에서였다. 스린 야시장에서 유리일까? 보석일까? 조명일까? 헷갈리게 만든 장본인이 탕후루였다. 자기들이 닭꼬치도 아닌 것이 비슷한 포즈를 하고 있었다. 색색의 과일들이 위로 목마를 타고 있었다. 포도가 또로로록, 딸기가 또로로록, 나무꼬치에 꽂혀서는 설탕물을 우비처럼 입고 있었다. 먼발치에서도 눈에 띄었다. 과일인 듯 사탕 같은 저 물체가 궁금했다. 가까이 가서 보자 윤기까지 더해져 침샘이 자동문처럼 열렸다. 딸기 탕후르를 사서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지도 상큼하지도 않은 밋밋한 맛이었다. 굳은 설탕이 이에 딱 붙어서는 떼어내기도 어려웠다. 그 후 탕후루는 그저 얼굴만 예쁘고 매력 없는 디저트로 자리매김하였다.

 

탕후루를 다시 만난 건 집 앞의 횡단보도였다. 학교 앞에 있던 조그마한 트럭에 가득 실려 있었다. 종종 그곳에 사람이 있었지만 붐비지는 않았다. 전에 경험했던 별 맛없던 탕후루였기에 스치기만 했다. 어느 날은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중학생의 자녀와 엄마의 대화가 들려왔다.


“탕후루 왔네. 아빠 것 까지 네 개 사가자.”


밋밋한 대화였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초등학생인 딸은 그 트럭 속 탕후루를 궁금해했다. 한 번 먹어보자고 했다.


“저거 맛없어. 엄마가 예린이 아기였을 때 대만에서 먹어봤는데.... 모양만 예쁘지 맛없어.”


라고 말했다. 아이는 나의 단호함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나 스스로가 정의 내리지 못한 맛은 늘 궁금함으로 남아 있었나 보다. 또 다른 날, 내게 저거 한 번만 먹어보자며 이야기했다. 두 번, 세 번, 반복되는 말에 간절함이 느껴졌다. 애처로운 눈빛에 응하며 한 개 구입했다. 아이는 신이 나서 탕후루를 깨물었다. 육즙이 터지는 것 같이 딸기의 빨강 과육이 터져 나왔다. 유리창이 깨지듯 얇은 설탕이 톡 깨지는 소리가 경쾌했다. 관심 없던 나는, 말리던 나는, 한 입만 달라고 하고 있었다. 한 입 먹는 순간


“이게 탕후루의 맛이었다고?”


기쁜 배신감이 몰려왔다. 팡팡 터져 흐르는 신선한 딸기즙과 얇게 코팅된 설탕 맛이 한데 어우러져 입 안에서 텀블링을 하고 있었다. 사탕도 아닌 것이 과일주스도 아닌 것이 처음 맛보는 조화로움이었다. 옆에 있던 아빠까지 한 입 베어 물고는 다음부터는 일인 일 탕후르를 하자고 말할 정도로 반해버렸다.


그 후 산타클로스를 기다리 듯 탕후루 아저씨만을 기다린 지 한 달이 넘어간다.


왜 진즉 맛보지 않았을까?

왜 속단했을까?

왜 오해 안에 나를 가두었을까?

아저씨는 언제 오실까?

오시긴 하는 걸까?   


한 번 맛 본 탕후루를 끝으로 더는 그 맛을 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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