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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Aug 27. 2020

뿌리내리는 시간

꼬마찰학자와의 대화3

뜨거운 햇빛이 거실에 드리운다. 여름날 강한 햇빛이 가득한 밖에 나갈 때에는 바르는 양산인 선크림을 늘 챙겼다. 화분들을 바라보며 아이는 그런 자신과 동일시했다. 햇빛을 온몸으로 마주하는 식물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 화초에 선크림 발라야 하는 거 아니야? "



우리 집에는 신혼 초에 들여와서 매 해 오렌지 음표를 달아주는 유주 나무와 잎이 풍성한 해피트리가 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늘 푸르름으로 제 몫을 다했다. 작은 화분들은 우리와 함께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나는데 두 나무만큼은 지금까지 함께해 볼 때마다 고마웠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해피트리의 끝 잎이 노랗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분갈이를 해달라는 목소리 같았다. 색으로 말을 했다. 


양재동 꽃시장에 들러 큰 장독대 크기의 화분과 흙 두 포대를 샀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화분보다 조금만 더 큰 크기를 원했지만 딱 원하는 것이 없었다. 식물들의 종류는 많았지만 화분의 종류는 적어서 선택의 폭이 좁았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의 키만 한 해피트리를 아파트 밖으로 옮겼다. 분갈이를 해 주려고 기존의 화분에서 나무를 빼내자 그 안에는 미처 상상하지 못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리수거장에나 있어야 할 법한 물건들이었다. 식물의 키를 높여주려고 했던 건진 엎어진 플라스틱 화분 하나와 하얀 스티로폼이 가득했다. 뿌리들이 스티로폼들을 꽉 부여잡고 있었다. 조각들을 떼어내느라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믿기 힘든 광경은 가끔 믿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바뀌며 현실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딱 봐도 잘못된 것들이 들어있었지만 혹시 이유가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며 의심의 방향을 바꾸려고 했다. 속은 것 같은 기분을 멈추고 일단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나무의 작아진 옷을 벗기고 큰 옷으로 갈아입혔다. 새로 산 화분으로 나무를 옮겨 심었다. 화분이 어찌나 큰지 흙 2포대로는 반밖에 채워지지 않았다. 다음날 흙을 보충해야 했다. 큰 화분을 집까지 올려다 놓고 남편과 그 안에 있던 스티로폼과 플라스틱 화분에 대한 역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흙의 부피를 채우기 위해서 저런 걸 가득 넣은 거 같은데?”

“설마 스티로폼이 보온 작용을 하나? 배수 작용을 하나? 꼭 필요한 건가? (믿고 싶지 않은 마음)

“이제껏 저 안에 쓰레기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산거야? 분갈이 안 했음 영원히 모르고 살았겠어.”


전문가가 아니라서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었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한 블로그에 그 행태에 대해서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글을 보았다. 글이었지만 그 안에서 흥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큰 화분을 흙으로 채우면 비용이 올라가므로 스티로폼으로 대신한 것이다.

흙으로 가득 채운 것보다 스키로 폼과 화분을 넣으면 무게가 줄기에 배송료가 줄어든다.

다른 재료가 아닌 폐스티로폼을 사용하는 것은 누가 봐도 비양심적인 행동이다.


그 글을 읽고 보니 의심은 확신으로 굳혀졌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식물을 다루는 사람들이 그런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오로지 자본이 기준으로 보이지 않는 곳은 속이는 것이다. 만약 그 안에 폐스티로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번듯하고 고고한 모양의 화분에 가려진 속은 비참했다. 세상의 한 단면을 마주한 것 같았다. 그 상황을 sns에 올렸더니 베트남에 사는 지인이 그곳에서도 그렇게 식물을 판다고 했다. 만국 공용어도 아니고 지구 저편에도 같은 모습이라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마음을 추슬렀다. 반려식물에게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며칠 뒤 흙 두 포대를 더 사서 화분에 채워 넣었다. 물도 듬뿍 주었다. 예쁜 돌도 얹어 꾸며 주었다. 시들했던 잎들이 곧 활기를 띌 것이라 예상하며 기대에 부풀었다. 그런데 15일이 지나도 여전히 시들했다. 


‘왜? 비옥한 흙을 가득 채워줬는데 왜?’


그동안의 스티로폼에 길들여진 걸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우리의 근심의 속도도 ktx처럼 빨라졌다. 물만 담가 주면 금방 생기를 찾는 꽃 같을 줄 알았다. 날짜는 가는데 부모 마음도 모르고 속을 썪이는 자식 같았다. 고개를 숙이며 힘을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소 식물을 잘 돌보는 아버지에게 왜 그런 건지 물어보았다. 




뿌리를 내려야 해.
그래야 크지.
뿌리내리는데 시간 오래 걸려.




모르던 사실이었다. 아버지의 말로 답안지를 얻었는데도 초조했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한 달이 지났을까 서서히 잎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정말 빠른 속도로 거대한 초록우산을 펼쳐 냈다. 무소식이던 잎이 눈 깜짝할 사이에 쭉쭉 뻗어나갔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랑으로 키운 식물이 우리에게 응답하는 거 같았다. 

새로운 환경, 흙에 촘촘히 뿌리를 내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즉석식품처럼 빠르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단단한 뿌리를 내리자 그 안정감으로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달려 나아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다. 


식물을 거울삼아 나를 들여다본다. 한 인간을 생각한다. 유년 시절의 사랑과 경험은 인생의 뿌리를 내리는 일 아닐까? 보이지 않는 어린 시절의 시간들을 잘 뿌리내리면 성인이 되었을 때 그 뿌리의 힘으로 세상을 향해 도전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 오랜 시간을 집에서 보내야 하고 홀로 있어야 할 일이 많아졌다. 길어지니 답답하고 힘겨워진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꿔 본다. 이 고독의 시간들이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해본다. 하나의 나무가 뿌리 따로 잎 따로가 아니듯 우리의 시간들도 멈추어 서서 안으로 뿌리를 내리다 보면 시간이 흘러 밖으로 마음껏 발산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곧 다가올 윤기 나는 초록 잎들을 생각하며 오늘도 뿌리내리는 시간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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