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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드 엔딩 말고, 펀 엔딩

by 하하연



영화, 소설, 연극의 새드엔딩과 해피엔딩.

엔딩의 종류는 왜 두 개밖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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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깔콘 긴 버전의 마녀 손가락.

아이는 인터넷에서 본 마녀 손가락을 하고 싶다고 했다. 집에 있던 잡지를 찾아 주었다.

종이를 작게 잘라 돌돌돌 말아 손톱에 끼웠다. 원뿔의 원지름이 작아야 손톱에 딱 맞게 끼울 수 있는데, 무작정 만들다 보니 손가락 전체에 다 들어가게 만들어졌다. 그런 시행착오 속에 만들어진 긴 손톱. 아이는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손 끝으로 식탁을 타다닥 두드리며 우아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이 상태로 리코더를 한 번 불어볼까?"

라면 호기심의 부피를 키워갔다.


그러다 이 상태에서 슬라임을 만지고 싶다고 했다. 집에 슬라임이 없으니 아이클레이라도 만져본단다.

그 이야기를 딱 듣자마자 예견되는 결말이었으나, 직접 해보는 것이 중요하므로 그대로 두었다.


방에 들어가 한 참을 가지고 놀다가 나왔다.


"망했어. 새드엔딩이야."

"왜?"

"다 달라붙어."

"우리 엽기 떡볶이에서 참치 주먹밥 먹을 때, 장갑을 달라고 했더니, 다 달라붙어서 숟가락으로 비벼 먹으라고 했잖아. 그거랑 같네. 두 소재가 딱 붙는 성질이 있네, "

"근데 슬프기만 해? 괜히 해본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하는 과정이 재미있었어. 그러니까, 해피 엔딩은 아니지만, 새드 엔딩도 아니야."

"그럼 무슨 엔딩이야?"

"펀 엔딩."

"펀 엔딩?"

"응 하면서 재밌었으니까 펀(fun) 엔딩."



망한 결과물치고는 하나의 조각처럼 멋지다.



그래 뭐든 결과론적인 점에만 집중하면 실패와 성공, 해피와 세드엔딩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과정에 집중하면 그렇게 슬플 일도 없다. 경험이 흐르고 그 과정 속에서 얻게 되는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할 뿐이다.



어떤 실패는 삶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한다.


몇 년 전, 두 번째 원고를 써서 투고를 했고, 출판사로부터 함께 책을 내자며 연락을 받았다. 그때부터 오랜 시간 원고를 주고받으며 글을 매만졌다. 퇴고 9개월 뒤, 내부 회의를 통해 원고 계약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다. 일방적인 수락과 일방적인 거절이었다. 온 마음이 글쓰기에 다 가 있었기에 삶이 통째로 무너졌다. 정신도 아득해졌고, 일상 생활이 어려웠다.

한 동안은 사정없이 흔들리는 거리의 풍선 인형처럼 넋을 잃고 살았다.


새드엔딩으로 끝이 난 이야기였지만, 과정에서는 수많은 경험이 축적되었다. 그 출판사에서 주로 사용하는 폰트와 자간, 행간의 아름다운 형태를 경험했고, 편집자님의 절제된 단어 사용과 단정한 글을 접할 수 있었고, 내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와 글의 형태를 피드백받았다. 그리고 글에 대해 다시 자세를 고쳐 다듬을 수 있는 고민의 시간들이 있었다. 어떤 콘셉트보다는 내용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본질도 알게 되었다.


더불어 내 삶에서 글을 쓰는 일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던 마음도 내려놓았다. 세상을 사는 방법은 다양하다는 걸 출판이 좌절된 순간에 알게 되었다. 글을 통해 여러 사람과 소통하는 것도 좋지만, 매달 스스로를 발견하고 성장하는 미션 클럽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독자처럼 한 사람의 삶에 작은 변화를 이끌 수 있다면 책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했다. <호호 미션 클럽>에서는 매달 새로운 주제로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매 달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것처럼 고민하고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호호 수집을 시작으로, 디자인맵, 감사일기, 그림 감상, 셀프칭찬, 좋아하는 물건 일기 등 주제를 바꿔 진행하고 있다. 책은 누구에게 가 닿는지 잘 알기 어렵다면, 미션 클럽은 실시간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떤 반응인지 바로바로 알 수 있고, 변화도 밀착해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메이트들간의 에너지가 특별한 이야기를 만들어 갔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실패의 과정 속에서 생각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을 만났다.

만약 그 실패가 없었다면 <호호클럽>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실패는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비록 아프고, 쓰리고, 힘든 감정이 동반되지만 말이다.

강한 태풍은 강제로 나를 다른 곳에 데려다 놓았다.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어떤 좌절을 맞이할 때, 충분히 아파하고 힘들어하되, 분명히 다른 문이 있다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실패가 실패로 끝나게 두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시간이 정해진 영화나 연극만 엔딩이 있을 뿐, 우리의 삶은 죽기 전까지는 엔딩이 없다.

재미, 행복, 슬픔, 분노, 좌절, 환희, 열정, 침체, 우울 엔딩 등 마침표가 아닌 쉼표만 있을 뿐이다.



좌절 옆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행복과 성공 옆에도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아이의 도전이 새드엔딩이 아닌, 펀 엔딩이었듯

우리의 모든 도전도 펀엔딩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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