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 가시의 개수와 맛은 비례하는 것일까?
삼치는 가시가 적은데 뻑뻑하고, 맛이 삼삼하다. 갈치는 맛있는데 가시가 너무 많다. 종종 그 둘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당히 기름진 고등어를 먹는 저녁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가시를 발라왔을까?
꼼꼼히 제거한다고 했는데, 아이가 먹을 때면 꼭 가시가 숨바꼭질하다가 튀어나왔다. 이제껏 잘 받아먹던 아이가 말했다.
“엄마, 이제 생선 발라주지 마. 내가 발라 먹을게."
"왜? 너 먹기 좋으라고 발라주는 건데?"
"엄마가 준 것에 가시가 있으면 억울한데, 내가 가져다 먹은 것에 가시가 있으면 안 억울해.”
엄마의 마음을 읽기는 어려운 나이일까? 서운했지만 그 사이 생각이 컸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한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으니 내가 감당하지만, 타인의 말대로 행동하다 어긋나면 자꾸 남을 탓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생선을 먹다가 본질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나도 어릴 때,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6학년 그날 아침은 환경미화 활동이 있는 날이었다. 편한 옷을 입으려고 했는데 엄마가 새로 산 멜빵바지를 입으라고 했다.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엄마 말을 듣고 그 옷을 입고 등교했다. 학교에 가는 길, 바지 끝이 길어서 바닥에 끌리지, 어깨끈은 자꾸 흘러내리지 집게로 쓰레기를 주울 때마다 불편했다. 활동 내내 속으로 엄마를 탓했다. 이 기억을 떠올리며 옷 입는 것 역시, 자율에 맡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일상 속에서 무수한 선택을 한다.
작게는 음식 메뉴를 고를 때,
크게는 대학의 과를 정할 때
직장을 선택할 때
주체적으로 선택한 사람과 누군가에 의해 선택한 사람의 삶은 다르다.
내가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떠밀려 한 선택은 고비를 맞을 때마다 스스로 감당하기보다는 누군가를 탓하게 된다. 한 번 잘못 끼운 단추가 줄줄히 밀려나듯, 한 번의 떠밀려서 한 선택은 삶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끈다.
그렇기에 삶의 주체성은 중요하다. 마음 따로, 몸 따로가 아니라 마음과 몸을 하나로 합쳐 움직여야 온전한 나로 살 수 있다. 내가 결정해야 내 삶의 주인이 된다. 몸과 마음을 두 개의 줄이라고 했을 때,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면 제자리이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떠밀려 가게 되지만 두 개의 줄을 하나로 합쳐 달리면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고, 쉽게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
그것이 내가 매 순간 의사를 결정하고 행동해야 하는 이유이다.
생선가시를 바르고 골라내어 먹는 행위. 는 무척 사소하게 여겨지지만, 그 사소함에서부터 내가 시작된다는 생각을 했다. 전에는 한 번도 내뱉은 적 없던 말이, 아이의 주체적 삶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신호를 알아챘으니, 이제 아이를 인정할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몰랐으니까,
어디에도 몇 살까지 생선살을 발라주라는 말은 없으니까 말이다.
아이의 말대꾸는 이렇게 부모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해주는 가이드라인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