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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Nov 30. 2022

갈림길 대신 2차선 도로






이 섬에 닿지 못하고 저 섬에도 닿지 못했다.



섬 사이의 바다에서 둥둥 떠 있는 날들이 많았다. 온전히 아이에게 관심을 쏟는 전업주부와 일이 있어서 출근하는 워킹맘. 두 개의 또렷한 섬에는 내가 없었다.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다가도, 내가 희미해질까 봐 불안했다. 아이를 돌보면서 틈틈이 블랭킷을 디자인해 판매하기도 하고, 작은 책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엄마로서의 자리뿐 아니라, 나로서의 자리도 지키고 싶었다. 이쪽 섬에 있다가 생각의 파도로 저쪽으로 떠밀려 가기를 반복했다.  


아이와 함께하다가도 생각이 다른 길로 샜다.

생각해보니 다른 길로 샌 건 내가 아니었다.


원래의 자리에서 엄마라는 다른 길이 생긴 것이었다. 29년 동안 나로 살았는데, 세상은 갑자기 엄마의 길이 원래의 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가 생기고 '나'라는 1차선 길에서 2차선 도로로 확장하면 좋으련만, 세상은 확장이 아닌 갈림길로 엄마라는 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엄마의 길을 가면서도 원래 있던(아이를 낳긴 전) 길을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이제는 안다. 한 생명을 돌보는 일에는 한 사람의 시간과 삶을 송두리째 써야 한다는 걸…. 그래야 아이의 뿌리가 단단해진다는 걸...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나를 나눠 쓰는 일이 처음이었다. 회사생활은 힘겨웠지만,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는 인정의 순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엄마의 자리는 줄곧 고요했다.



체력과 정신력은 더 많이 소모되었지만, 인정의 순간은 없었다. 아이의 뿌리를 위해 나는 더 깊은 땅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오늘 파고, 내일 파고 그렇게 몇 년은 계속 땅속에 있어야 했다. 엄마의 일은 처음 하는 것이었기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지 몰랐고, 나의 정성으로 아이가 커가는 즐거움이 커질수록 존재로서의 나는 작아졌다. 일하는 친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경력을 더해, 땅 위로 꽃을 피우고 연둣빛 나뭇잎을 풍성히 키워갔다. 땅 속에 있던 나는 그 푸르름이 부러워 조바심을 냈다.  

   

나는 왜 아이에게 전념하지 못할까?

나는 왜 내 일을 찾아 아이를 맡기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지 못할까?     



정해놓은 틀 속에 나를 가둘 수 없어 질문만 끌어안은 채로 날마다 앓았다. 그러다 나 같이, 전업주부와 워킹맘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으로서 살기를 원하는 동시에 아이의 성장 과정도 함께하길 원했다.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며 스스로의 모습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상한걸까? 생각하는 날이 많았는데, '원래 그런 사람들도 있구나'를 알게 되었다.  빨리 깨달았다면 좋았을 테지만 모호했던 감정을 선명하게 하는 데에는 헤매는 시간이 필요했다.



세상에는 하나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사이에서 작은 웅덩이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몇 개로 나누어 쓴다. 엄마이긴 하지만 나로 살고 싶은 사람들. 세상이 정해놓은 정규속도보다 조금 느릴지 몰라도 엄마의 성장과 아이의 성장을 천천히 함께 돌본다. 2차선 도로 위로 나란히 달린다.      


몇 년 동안 생각의 바다를 떠다니다가, 이제야 새로 발견한 <낫 워킹맘 섬>에 발을 딛고 산다. 세상에 전업주부 섬, 워킹맘 섬 등 두 개의 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시간, 누군가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렇게 말해 주고 싶다.


"당신의 섬도 세상 어딘가에 존재해요."


그동안 갑자기 주어진 엄마라는 자리에서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면, 이젠 멈추어 서서 나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길 바란다. 세상과 미디어가 정해놓은 엄마의 모습 말고,  모습을 스스로  그려보자. 어떤 엄마로 살아가야 내가 나에게 가장 편안할까?  




#낫워킹맘#엄마에세이#일하지않는엄마가하고있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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