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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로리 Nov 28. 2022

전등스위치에 묻은 지문

#낫워킹맘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나는 집에 있는 동안 전등 스위치를 여러 번 껐다 켠다. 동트기 전 새벽녘에 남편의 출근 준비를 도울 때에도, 아이들 방에 들어가 아침을 알릴 때에도, 식사 준비를 하러 주방으로 들어갈 때에도, 나만의 시간을 가지려 서재에 들어갈 때에도. 그렇게 각 방의 전등 스위치는 내 검지 손가락 지문이 가장 많이 묻어있는 곳이다. 하지만 아주 일상적인 나의 일과 중 하나를 군대와 비교해보자면, 나는 제일 말단 후임과 다를 바 없다. 




엄마라는 ‘직업’ 속에서 회의감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특히 워킹맘이 아닌 전업주부로 살면서 허탈한 감정은 자주 나를 뭉갰다. 그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도 했다. 최근에 주변에서 승진 소식이 여럿 들렸는데 그들은 나와 비슷한 나이이고, 아이들도 비슷한 또래를 가진 워킹맘이었다. ‘엄마’라는 사람이 온전히 필요했던 때를 무사히 넘기고 하나둘,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던 워킹맘들은 이제 떳떳한 자리에서 아이들을 서포트해줄 수 있었다. 물론 워킹맘들의 비애와 속앓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엄마들과 엘리베이터 같은 공간에서 나란히 서 있자면, 거울을 통해 비교되는 이질감 느껴지는 옷차림과 화장끼 없는 얼굴 등. 암묵적으로 내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속상하다고 남편에게 넋두리해봐야 그뿐이었다. 감정의 밀도는 다 달라서 슬픔이 가슴을 파고드는 것도, 가볍게 스치는 것도 모두 전업주부인 ‘나’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전업주부의 ‘일’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뭐지? 전업주부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

전업주부가 타인에게 칭찬이나 인정받는 일이란 과연 육아와 가사뿐일까?

전업주부에게는 왜 9시 출근, 6시 퇴근처럼 정해진 노동시간이 없을까?

상여금은 둘째치고 왜 무보수로 그렇게 열심인 걸까?

전업주부들은 무슨 행복으로 하루를 살아갈까?

나는 행복한가? 만족스러운 삶인가?

나도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지금이라도 일을 시작할 수 있을까?


일에 대한 생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보니, 사실은 나 역시도 ‘인정받고 제대로 된 일이 하고 싶다.’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에게도 꿈틀거려보고 싶은 욕구가 생겨 버린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무슨 일을 한 단 말이지? ('새로운 일을 도전해볼까?' 라며 생각했던 엄마들도 결국 현실과 마주하면 시작도 하기 전에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 이유는 할 일이 제한되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어떨까? 난 여전히 ‘워킹맘’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업주부’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다닌다. 우리는 이제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한 기준을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문적인 일을 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일의 형태가 바뀐 것뿐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고 계속 노력해야 한다. 


작년에 TV 프로그램 <엄마는 아이돌>이 인기였던 적이 있다. 출산과 육아로 우리 곁을 떠났던 여가수들이 다시 한번 무대에 올라 아이돌처럼 완벽한 컴백을 도전하는 프로젝트형 프로그램이었는데 TV를 잘 보지 않는 성격이라 모르고 살다가 우연히 마지막 회를 보고 펑펑 울었다. 10년이란 세월은 천상 춤꾼이었던 사람도 몸을 굳어버리게 만들어 버렸다. 고음도 연습이 없이는 예전처럼 높은 옥타브가 올라가질 않았고 그럴 때마다 그녀들은 좌절하고, 울고, 서로가 민폐녀가 된 것 마냥 미안해했다. 하지만 처음 인터뷰했을 때처럼 ‘엄마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족들에게 다시금 보여주고 싶다며 노력에 노력을 더하는 모습이었다. 나를 한 번 더 울렸던 장면은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남긴 메시지였다.


“많은 엄마들이 저희를 보면서 힘을 냈으면 좋겠어요. 엄마이기 전에 한 사람이니까요. 꼭 아셨으면 좋겠어요.”


살아가며 꿈을 잊고 살 수밖에 없던 나와 같은 엄마들에게 분명 남다른 울림으로 남겨졌을 것이다. 그 후로 그녀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겉으로 보기에 그녀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엄마이자 전업주부이며, 여가수로 활동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경력의 단절을 다시 이어갈 수 있는 것은 결국 노력과 생각의 전환이다.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 걱정은 우리에게 불안만 야기할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걱정의 수렁 속에서 뛰쳐나오기 위해서는 '생각 스위치'를 만들어야 한다. 충분히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생각 스위치를 꺼두는 것이다. 당장 결과를 바라지 않아도 되는 일부터 하나씩 시작해야 한다. 무엇이라도 배우려고 노력하고, 집에서도 나의 시간을 확보하려고 해 보자. 자격증 취득, 외국어 공부, 몸매 관리를 위한 갖가지 운동, 엄마들끼리 하는 어설픈 독서모임이어도 확보된 시간은 허투루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말이다. 경험상 어떠한 것이든 엄마가 꾸준히 하고 있는 일에 있어선 가족들이 그 일을 존중해줬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중요한 건 꾸준함이다.


나의 일상은 이제 ‘엄마로서의 삶’만으로 채우기에는 뭔가 만족스럽지 않은 구석이 있다. 요즘 나의 일상은 ‘엄마 역할’ 퇴근과 동시에 ‘오롯한 나’로 출근한다. 매일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글로 사람들과 나눈다. 삶의 활력을 찾고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나의 하루를 채우다 보면, 조급하고 초조한 마음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기지개를 켠 것처럼 개운하다. 


우리 집 전등 스위치의 온오프는 여전히 나의 몫이지만 이제는 더 이상 허탈한 감정을 느낄 수 없다. 




#낫워킹맘 #엄마에세이 #일하지않는엄마가하고있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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