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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Dec 20. 2022

시간 수집

녹색학부모활동


일 년에 두 번 <녹색 학부모 활동>을 한다.



어떤 학교는 자원을 받는다고 하는데 우리 학교는 전교생의 학부모가 다 참석해야 한다. 1학기 때에도 했기에, 2학기도 정해진 날짜에 맞춰 나가기 위해 며칠 전부터 집중을 했다. 아차 하다가는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추워진 날씨를 대비하며 전날부터 패딩, 모자, 장갑을 현관문 앞에 준비해 두었다. 8시 20분까지 가야 하니, 아이보다 이르게 집에서 학교로 출발했다. 구멍이 뽕뽕 꿇린 형광색 조끼를 입고 노랑 깃발을 들었다. 옷만 갖춰 입었을 뿐인데 갑자기 사명감이 생겼다.      



내가 담당한 곳은 학교 후문의 횡단보도 세 개가 있는 곳이었다.



아이들이 어느 곳에 있느냐에 따라 여기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자리를 옮겨가며 교통안전을 책임졌다. 저 멀리서 김이 서린 안경 때문에 눈이 하양 동그라미가 된 학생이 다가왔다. 내 옆에 서서 김 서린 안경을 닦는다.      



두 남자아이가 저 멀리서 달려온다. 신호가 아슬아슬하다. 초록불이 5.4.3 휙! 한 아이가 건넌다. 한 아이는 미처 건너지 못했다. 반대편 친구가 건너지 못하는 친구를 기다려 준다.      



다른 무리의 친구들 중 한 명은 집 옆에 놓인 배수관의 맺힌 고드름을 발로 차 떨어뜨린다. '토도독' 고드름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경쾌했다. 그 친구의 관찰력이 예사롭지 않다. 아이들 눈에는 그런 것들이 잘 보이는 모양이었다.      



반대편에 무거운 과학상자를 든 아이는 바닥에 상자를 내려놓고 횡단보도를 등지고 화단에 뭐가 있는지 관찰하느라 집중한다. 신호가 바뀐지도 모른 채 넋을 놓고 있기에 “신호 바뀌었어. 건너야지”라고 알려주었다. 그제야 무거운 상가를 들고 길을 건넌다.    


  

내가 서 있는 곳의 신호가 빨강 불로 바뀌자, 두 명의 친구가 건물 뒤로 사라졌다. 신호로부터 자유로운 주택골목으로 빠진 듯 모였다. 나만의 경로를 만들어 가는 아이 덕에 그쪽에 골목길이 있다는 걸 새로 알았다.      



한 친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호가 바뀐지도 모르고 건너지 못했다. 한 번을 더 기다렸다. 기둥에 가려 서 있어서 나도 그 아이가 있는 줄 미처 알지 못했다.   


    

모자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패딩을 입고, 안에 겹겹의 옷을 입어 괜찮았지만, 손끝과 발끝이 아려왔다. 발을 동동 굴러가며 뛰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학교에서 는 방송반에서 튼 bts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때쯤 한 자동차가 교문 근처로 들어섰다. 애매한 위치에서 문이 열렸다. 아빠가 먼저 나온 후, 뒷 문을 열자 딸이 나왔다. 아빠는 아이의 작은 어깨에 가방을 매 주고는 아이를 꼭 껴안았다. 아이의 얼굴이 아빠의 가슴에 폭 묻혔다.

아침 등원 시간은 모두에게 3배속으로 흐르는 시간이다. 아이들의 표정도 분주하고, 어른들의 발걸음도 빠르다. 하지만 그들에게 아침의 분주함 따위는 소용없었다.

둘에게만 슬로모션이 걸린 듯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한참을 꼭 안고는 아빠는 아이를 배웅했다. 그 장면을 넋을 잃고 보다가 나는 안내를 놓칠 뻔했다. 아이가 가다가 멈추어 섰다. 유턴해서 돌아가는 아빠의 차를 향해 손을 흔든다.      



주위의 눈을 녹일 만큼 온기 있는 장면이었다.      



기차에서 헤어지는 연인들의 종종거림, 할아버지 손을 잡고 가는 손주의 눈빛 등 살면서 사랑스러운 장면을 만나게 된다. 사랑은 그렇게 숨길 수 없어 자주 들킨다.      

사랑, 꼭꼭 숨어있지 말고, 자주 들키길 바란다.


보는 사람들의 품에도 사랑이 쏙 안기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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