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말이 되면, 거리가 들썩인다.
아직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마음은 이미 12월을 마중 나간다.
밤거리의 나무는 진주 목걸이를 한 듯 조명을 반짝이고, 상점에는 트리들이 하나, 둘씩 들어선다. 거리 곳곳에서 12월의 축제인 크리스마스를 즐길 준비를 한다. 곳곳에 놓인 이색적인 트리 앞에서 사진을 찍었고, 백화점에 수 놓인 장식에 감탄했다. 어떤 해에는 나뭇잎으로 만든 초록 원피스 트리로, 어떤 해에는 건물 3층 높이의 거대한 트리가 실내에 들어온 것을 보며 그 해의 12월을 기억했다.
이렇게 감상만 하던 12월이었는데, 수집을 좋아하게 되면서부터는 무언가 자꾸 내게 말을 거는 듯했다.
쇼핑몰의 종이가방도 빨강,
선물 상자도 빨강,
포스터도 빨강,
트리에 매달린 리본도 빨강,
심지어 주걱까지 빨강이었다.
12월, 빨강색의 단합대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 달 동안 빨강을 수집했다. 어디를 가도 빨강이니, 빨강색 수집은 너무 쉬웠다.
처음에는 혼자 수집하다가, 사람들과 함께 수집하는 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어 SNS이 이런 글을 올렸다.
<12월 이벤트> 우리 같이 #빨강수집해요.
12월은 온 세상의 빨강이 다 외출하는 달이잖아요.
어디를 가든 자꾸 빨강이 부딪히는 12월. 빨강에 애정을 쏟아볼까요?
각자 빨강이 들어간 것들을 찍은 후 사진을 올리고 #빨강수집 해시태그를 달아 주세요.
기간은 12월 31일까지. 1월 3일 추첨을 통해 세 분께 책 한 권을 선물로 보내드립니다.
미어캣이 된 듯, 가는 곳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빨강색은 열 한 달을 무심코 지나치는 색이었지만, 관심을 가지고 보니 곳곳에 보였다. 서점에 가서도 , 운동화 가게에 가서도, 전시회에 가서도 빨강에 시선을 멈추었다.
‘discover adventure everywhere around you’
‘어디에 있든, 영감은 당신 눈앞에 있다.’
<우연히웨스앤더슨>의 사진 전시회에서 본 글이었다. 정말 그랬다. 어디를 가든 빨강은 내 눈 앞에 있었다.
빨강을 편애하기 시작하자,
꽃집에 가서도 평소에는 흔하다고 생각해서 잘 고르지 않았던 빨강 장미와 빨강 튤립을 사고, 빨강 모자를 쓴 산타할아버지 카드를 골라 편지를 쓰고, 빨강 줄무늬 지팡이 모양의 연필을 샀다. 안다즈호텔에 빙수를 먹으러 갔을 때도 빨강 조각품이 눈에 들어왔다. 모던하우스로 주방용품을 사러 가서도 빨강 장화 모양 접시, 빨강 와인잔, 빨강 주걱을 만났다. 동네의 자주 가는 카페에서는 수 많은 의자 중, 빨강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코스트코에는 빨강 도트문의 와인을 만났다.
한 달동안 모든 생각을 빨강에 맞추어 사는 것도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이 모습을 본 주변의 사람들도 수집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독서모임을 하러 책방에 갔는데, 빨간빛의 종이컵에 커피가 담겨 있었다.
“어머, 이거 뭐에요(평소에 커피잔에 커피를 준다)?”
“하연님 요즘, 빨강 수집하셔서 빨강 종이컵에 드리려고 집에서 가져왔어요.”
J의 생일에도 빨강 케이크가 등장했다.
“하연씨가, 빨강 수집하길래, 빨강 케이크를 안 살 수가 없더라고요.”
“우리 다음 주에는 드레스 코드를 빨강으로 맞춰 입고 올까요?”
“좋아요.”
빨강수집이 번져갔다.
나는 머리에 빨강 리본을 하고, 빨강 운동화를 신었고 세 사람은 빨강 스웨터를 입고 등장했다.
“어쩜 다들 집에 빨강 옷이 있어요?”
(입으려고 옷장 속을 찾아 보니, 빨강 옷이 없었다.)
“전 없어서, 남편 것 입고 왔지요.”
옷장 속에 잘 안 입던 옷들도 수집페스티벌 덕분에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들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빨강수집은 이어졌다.
딸기 뷔페에 갔다가 식탁에 올라온 다양한 모양의 딸기 사진을 찍은 사람.
이와사키치히로의 그림책에서 빨강 모자를 쓴 소녀의 그림을 찾은 사람.
자신의 필통, 만년필, 책 등 빨강 삼총사를 찍은 사람.
작은 트리에 탐스러운 열매처럼 달린 빨강 오너먼트 사진을 찍은 사람.
누군가는 빨간빛 옷을 입고, 빨강 볼펜을 들고, 빨간빛 마우스, 빨간빛 티포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며 본인은 평소에 쭉 빨강을 좋아해서 빨강물건이 많다고 했다. 한 달 이벤트가 아닌, 평생 이벤트로 빨강을 즐기는 사람도 만났다. 또 누군가는 특별한 날이면 옷장에서 빨강 색의 옷을 찾아 입는다는 징크스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일본에 사는 S는 집 안에 있는 빨강 소품을 모두 모아, 잡지 같은 사진을 찍어 올렸다. 빨강 베레모, 빨강 바지, 빨강 아기 신발, 빨강 인형, 빨강 양말, 빨강 구두, 빨강 와인, 빨강 볼펜, 빨강 삼양라면, 빨강 에코백, 빨강 티매트, 빨강 자 등등 빨강박물관이었다. S의 사진 아래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나의 수집의 역사를 돌아보면, 초등학교 시절 과자에 들어있던 따조(동그란 플라스틱)를 시작으로 국진이빵 스티커 그리고 미미인형 등등등. 그 뒤로 젝키의 팬으로 사진을 수집하고, 다꾸를 위한 스티커, 색연필 사인펜, 그리고 잡지는 mr.k를 수집했다. 일본에 와서는 미니어처에 빠졌다가 지금을 양말을 수집하는 건가? 아니구나. 지금은 비즈와 리본 패브릭을 사 모은다. 틈틈이 양말과 신발, 귀여운 가방을 사는 것도 까먹지 않는다. 마음 건강을 위해 떨어지지 않게 와인을 구매한다. 아무튼, 이번에는 #빨강수집
우리 집에 손님으로 오셨던 하연님이랑 예전에 체크수집, 체크무늬만 판매하는 그런 상점 하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한국이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간 빨강이 되어 하연님을 만나러 가고 싶다.
/ <출처 @soae의 인스타그램>
에세이 같기도 하고, 편지 같기도 한 그녀의 글을 보며 한 개인의 어린시절투터 이어온 수집 이야기도 알 수 있었다. 그 글 아래에는 다른 분이, 어렸을 때 계란요리만 파는 식당하고 싶었어요.(간판은 계란 후라이)다는 답글이 달리기도 했다.
( 그 글을 보며, 계란요리 맛없는게 없는데... 진짜 그런 식당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하는 수집도 좋지만, 함께 하는 수집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각각 가지고 있는 빨강에 대한 태도와 추억을 들을 수 있어, 12월이 한 권의 책이 되는 것 같았다.
누군가 마련해 놓은 들뜬 12월의 시간도 좋지만, 각자가 한 해를 마무리하며 함께 즐길 수 있는 일을 기획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었다. 회사나 브랜드가 만들어 놓은 행사 뿐 아니라, 우리가 주체가 되어 우리만의 12월을 맞는 것도 의미 있는 일 아닐까? 할로윈처럼 개개인의 즐거운 축제가 생겨났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마음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축제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