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게도 기획력이 필요하다.
가족은 많은 시간을 공유하는 사이이기에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이 그날인 것 같은 비슷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하루의 콘셉트를 정하면 가족과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특별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나는 김포의 게으른 책방을 가고 싶었고, 남편은 지식산업센터를 가고 싶어 했고, 아이는 홍대를 가길 원했다. 원하는 것이 다르니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몇 십 분을 고민하다가 남편이 오늘은 아이가 가이드가 되어 우리를 안내하는 것은 어떨까? 라며 제안을 했다. 아이도 좋아했다.
가깟으로 의견을 모아 외출준비를 시작했다.
“가이드님 처음 코스는 어디인가요?”
“영풍문고입니다.”
아이는 본인이 원하는 가수의 시디를 보기 위함이었지만, 우리도 책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차에 타서 이번 여행의 제목은 무엇으로 정할까? 고민했다. 아이가 말했다.
<MZ 따라잡기>입니다.
아이세대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어 좋은 기획이었다. 동시에, 남편과 내가 누가 더 그 문화를 잘 따라잡나 목표의식이 생겼다. 처음 영풍문고에 들러 문구도 구경하고, 책도 구경했다. 크리스마스여서 그런가 사람들이 많았다. 큰 서점 둘러보다가 스티커 기계를 발견했다. 특별한 날이니, 사진을 꼭 남기고 싶었다. 하나는 앱을 다운로드하여야 해서 번거롭게 여겨졌다. (그 순간 MZ와 멀어졌다. 귀찮아하다니...) 그 옆 기계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입력하면 사진을 골라 출력할 수 있었다. 훨씬 단순했기에 그 기계를 선택했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었지만 이런 우연한 행운을 만나면 여행을 하는 듯 즐거웠다.
다음 코스를 물으니, 아이는 자기가 자주 가는 코인노래방으로 안내했다. 사람들 사이를 쏙쏙 피해 가며 건물에 들어섰다. 아이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니 이미 긴 줄이 있었다. 방이 40개나 되는데 다 만석이었다. 평소라면 긴 줄을 보고 돌아 나왔겠지만, 오늘의 여행은 MZ 따라잡기이므로 줄을 기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남편과 나와 같은 중년은 없었다. 다 초, 중, 고등학생뿐이었다. 코인노래방은 청소년출입시설로 방마다 문이 투명 유리창으로 되어있었다. 기다리면서 방 안을 들여다보니, 아이들이 방방 뛰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그런 활기참을 본 적이 없었는데, 아이들의 활기찬 모습에 기분이 덩달아 좋아졌다. 40분을 기다렸을까? 우리 차례가 되었다.
12곡에 5000원
30분에 4000원
두 가지 중 하나를 고르기로 했다. 남편은 12곡을 하자고 했지만,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12곡은 너무 많은 것 같아 30분을 고르자고 했다. 두 사람을 얼떨결에 그러자고 응했다. 아이의 안내로 핑크색 마이크커버를 들고 노래방 안으로 입장했다. 좁은 방이었지만 깨끗했다. 아이는 능숙하게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 노래의 번호를 골라 눌렀다. 나는 왕년의 솜씨로 다음 곳을 미리 예약하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찾는 물건이 없었다.
“노래방책 어디 있어?”
“그런 것 없어. 리모컨으로 노래이름 누르면 돼.”
아 그새 바뀐 건가? 당황했다.
다음곡으로 아이가 좋아하는 러브다이브를 예약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1절만 부르고 다른 곡을 불렀으면 좋겠는데, 아이는 마지막에 나오는 점수가 중요한 모양이었다. 끝까지 다 기다려 점수를 본 후에야 다음곡으로 넘어갔다.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남편이 신승훈의 노래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다며 시간을 지체했다. 이게 뭐라고 남은 시간을 보며 초조해했다. <내 방식대로의 사랑>을 한참을 찾았다.
그 후 평소 남편과 아이가 즐겨 부르는 헨리, 소향의 듀엣곡 – 마비게이를 제안했다. 그런데 헨리 소향을 입력해도 안 나오고 마빈게이를 쳐도 안 나왔다. 그렇게 시간이 또 흘러가고 있었다. (제안한 내 잘못이다. 다음부터는 부를 노래리스트를 적어와야지 생각했다가, 아니다 곡제한으로 선택해야지.라고 생각했다.)
시간은 금이다.
돈은 살 수 있지만, 시간은 살 수 없다.
불로장생 등
시간의 소중함을 말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접했을 땐 별로 와닿지 않았는데, 노래방 안에서의 30분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버튼 한 번 잘못 누르는 일에도 예민해지고, 다음 곡이 예약되어 있지 않으면 초조했다. 그 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12곡이었다면 세월아, 네월아 서로 채근하지도 않고 평화롭게 노래를 할 수 있을 텐데, 시간제한으로 선택하는 바람에 다이너마이트가 곧 터질 듯 기계를 계속 주시했다.
그 모습이 스스로 보기에도 우스웠지만, 책을 통해서도 실감하지 못했던 1분 1초의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 또한 의미 있었다.
무슨 일을 하든 노래방 안에서의 마음가짐으로 임한다면, 누구라도 성공은 코 앞에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 마법은 노래방 안에서만 이뤄진다게 문제였다. 흥겨운 문을 나오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시간을 팡팡 낭비하며 살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해본다.
하루를 시작할 때 노래방기준 요금처럼
24시간 X 8000원 = 192000원을 날마다 지불하고 시작한다면 어떨까?
192000원이 아깝지 않도록 초를 재며 하루를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깝지 않을까?
노래방에서 잘못한 선택으로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간의 가치를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는 노래방에서 나온 후 바로 탕후루 집으로 향했다.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움직였다. 마치 하루에 192000원의 돈을 지불 한 사람처럼 일사 분란했다.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고, 옷을 사고,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부터 시간을 좀 다르게 대할것이다.
노래방에서 남은시간처럼 귀하게 여길 것이다.
출발할 때
<MZ 따라잡기>프로그램이 이런 지혜를 담고 있을지 미처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