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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Dec 30. 2022

내가 식당에서 뭘 본거야?

<에르빈부름 작품>





평소 가고 싶었던 오마카세집이 있었다. 디너코스는 무리여서 가벼운 런치코스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남편이 월차를 쓴다기에 이때다 싶어 예약을 했다.      



우리 부부는 스시를 좋아한다. 사는 동네에 훌륭한 스시집이 있으면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 동탄에 살 때에 집 근처에 맛있는 스시집이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사 먹곤 했다. 짜장면보다 많이 먹는 음식이 스시였다. 이 맛집이 우리 인생의 기준점이 되어버렸다. 그곳에 살 때는 극락 같은 환희였지만, 이사를 하며 못 먹게 되자 슬픔이 되었다. 웬만한 스시에는 만족하지 못했다. 이사 온 동네에서도 이곳저곳 다양한 스시집을 방문했지만, 딱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양은 푸짐했지만, 회의 신선도가 떨어져서 탈락.

호텔셰프가 운영하던 스시집도 먹을만해서 종종 들렀지만 가게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바람에 탈락.

배달료 6000원 하는 곳에서도 사 먹어봤지만 몇 개의 스시가 비릿해서 탈락.     




결국 동네에서 스시 집 찾기는 실패로 끝났다. 스시 없는 삶이란, 얼마나 기운 빠지는 일인지...  


   

한우보다 스시

곱창보다 스시

짜장면보다 스시     



스세권을 희망했던 우리의 삶은 점점 침울해졌다. 동네에 보리굴비, 닭갈비, 모둠꼬치, 양념갈비, 중국집 등 다양한 종류의 맛집이 있었지만, 스시를 대체할 순 없었다. 그렇게 방황하는 우리에게 동네오마카세는 마지막 남은 희망이었다. 비록 자주 가지 못해도, 가끔 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한 곳이 보일러를 틀 듯 따뜻해질 수 있는 기회였다.      



부푼 마음으로 가게로 들어갔다. 8인이 앉을 수 있는 바 형태의 작은 공간이었다. 스시의 밥알처럼 모르는 손님과 오밀조밀 앉았다. 부드러운 계란찜을 시작으로 18개의 코스가 시작되었다.      



  번쯤 맛본 고등어, 삼치, 도로 등의 재료였지만 다른 소스, 소금, 과일, 향이 더해지면서 처음 맛보는 새로운 요리가 탄생했다.





작품을 마주하듯 하나씩 설명을 듣고, 저마다 다른 질감과 맛을 음미했다. 훈제한 삼치를 특유의 향을 머금어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셰프는 친절했고, 함께 하는 손님들도 소곤소곤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빚어내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장면에 이빨에 낀 고춧가루처럼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이 끼어들었다. 좁은 공간에 두 명의 직원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셰프의 일을 돕는 한 명의 직원이 가끔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에게 한없이 친절한 셰프가 그 직원을 부를 때면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종용했다.      


“국, 리필해.”

“접시 닦아.”     


복화술을 하듯 작은 소리였기에 식당에서 흔히 나눌 수 있는 대화라고 여겼다. 그런데 막바지에 이를수록 누군가를 혼내는 교실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없었던 사이에 둘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깐의 시간 동안 목격한 건 셰프는 화가 나 있었고, 직원은 주눅 들어 있었다. 셰프가 무슨 지시를 하면 직원은 한 번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지막 계산을 하려는 때, 직원을 향한 셰프의 불편한 말투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빨리 나가서 안내하라고.”     


맛있는 음식을 풀코스를 먹고 나온 게 맞는데, 기분이 찜찜했다. 그날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불편했던 마음을 숨기고 있었는데, 남편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직원을 너무 혼내던데..”

“여보도 그렇게 느꼈어? 나도 느꼈어.”

“우리 있을 때도 이 정도면 없을 땐 얼마나 심할까?”

“그러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너무 주눅 들어 있어서 안 됐더라.”

“저분은 다른 곳에 가면 더 좋은 대접을 받을 수도 있을 텐데.. 둘이 잘 안 맞나 보다. 저렇게 좁은 곳에서 마음 안 맞으면 지옥일 텐데...”     


평소 둔감한 남편이 느낄 정도라니...     

보통의 식당에서 종종 불친절한 직원들을 만나게 된다. 밥공기를 ‘탁’ 내려놓는다던지, 질문에 한참 뒤 응답한다던지 말이다. 그런 일들은 그저 그 한 사람의 기분 탓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달랐다.   

  


손님에게는 너무 친절한 말투.

같은 공간에 있는 직원에게 하는 날 선 말투.

두 개가 공존했다. 인간의 양면성을 눈앞에서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불편했다. 분명 맛있고,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먹고 나왔는데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소 이상했던 경험을 통해,



우리가 먹는 건, 기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입에 아무리 황홀한 맛의 음식이 들어와도 먹을 때의 기분이 좋지 않다면 그건 좋았던 식사라고 말할 수 없다. 훌륭한 요리 안에는 그 공안에 있는 다정한 태도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호들갑스러운 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로 존중하는 공간에서 식사를 하고 싶다. 요리를 먹는다는 건, 그 안에 담긴 마음을 먹는 일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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