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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Dec 09. 2022

내일 모레, 아흔이 어때서?

노인들에게 호의적인 도시, 분당




여러 번의 이사를 통해 도시별 개성을 알게 되었다.




결혼 후, 남편의 직장을 따라 서울에서 천안으로, 천안에서 동탄, 동탄에서 판교로 집을 옮겼다. 아이를 키우기에 가장 좋은 도시는 동탄이었다. 신도시여서 모든 건물과 카페, 편의점이 쾌적하고 또래의 엄마들이 많이 살고 있어 학원가도 잘 형성되어 있다. 아파트 주변으로 골라 먹을 수 있는 반찬가게가 5곳이나 되고, 카페도 취향 따라 고를 수 있다. 빵집은 얼마나 다양한지, 거리에는 코끝을 건드는 향긋한 빵 냄새가 늘 가득하다. 과일 가게도 8곳, 모든 종류별 음식(양식, 한식, 분식, 동남아식 등등)도 가득하다. 동탄에 살 때에는 그렇게 좋은 도시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남편의 의견으로 서판교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주변은 근사한 전원주택이 즐비해서, 한국에도 이런 곳이 는지 놀랄 정도로 이국적인 광경이었다. 동네는 조용하고 평온했다. 하지만 인구밀도가 적으니 아파트 앞에 편의점 하나가 없었다. 아이의 초등학교 앞에  흔한 떡볶이집, 문방구도 없다. 남편은 너무 만족하는 동네였지만, 아이와 내가 살기에는 다소 불편한 곳이었다. 좋아하는 초밥집도, 샤부샤부 집도 없으니 말이다. 장은   보려고 하면 20분은 걸어 나가야 한다.

하지만 서울과 접근성이 좋고, 동판교, 분당과의 거리가 가까워 다양한 문화생활이 가능한 장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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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용인에서 장욱진 전시가 있어 방문했는데 깜짝 놀랐다. 미술관 안에 노인들이 많았다. 평소 미술관 가는 것을 좋아해서 자주 방문하는데 거의 20년 미술관 관람 역사상 그런 풍경은 처음이었다. 노부부가 손을 잡고 그림을 보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감동스러워 울컥하기까지 했다.


고요한 공간에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     



몇 년 전, 도쿄에서 고흐의 전시를 볼 때, 미술관 안에 노인들이 많아 놀랐던 기억이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문화생활을 즐기는 그 모습이 좋았다. 내심 그 나라의 문화가 부러웠다. 왜 우리나라의 미술관에는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인지, 도쿄의 미술관 풍경을 보며 의문을 품기도 했었다. 그런데 용인, 분당의 미술관에서는 노인들이 문화생활을 즐기는 모습이 일상이었다. 내가 몰랐을 뿐이었다.      



백화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분당의 롯데백화점의 푸드코트에 들어서자 반 이상이 노인분들이었다. 그 자리에 껴서 먹기가 머쓱할 정도였다. 어르신들이 물을 뜨러 정수기에 다가가면 직원분들이 친절히 다가와 혹시라도 뜨거운 물에 손이 데실까 물을 따라 드렸다.

자신이 부모님을 살피듯 마음이 가득 담긴 행동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밥을 먹고 나와 카페에 들렀다. 그곳에도 예쁜 모자를 쓴 할아버지들이 그룹을 이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분, 네 분 모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이 동네 노인들이 살기에 너무 좋은 곳이구나. 생각했다. 홀로 보단, 여럿이 함께 어울리는 것은 전 세대를 막론하고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었다. 말끔하게 차려입고 나와 친구들과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카페로 모여든 사람들. 어떤 이야기를 나누실까 궁금해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옆에 앉아있는 학부모들의 생기발랄한 목소리가 할아버지의 대화를 다 덮었다.      



그들이 나가자 할아버지 중 한 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는 참 여자를 좋아해. 곧 내일모레면 아흔인데, 만나긴 뭘 만나?”     




앞의 이야기는 듣지 못해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친구 중 한 분이 여자 친구가 생긴 모양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내일모레 아흔이면 더 열심히 만남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일모레 아흔이 어때서...



그분은 얼마나 설렐까? 분홍빛 장면을 상상했다.



     

노인들이 미술관에 가고, 노인들이 모여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오늘의 풍경이 이렇게 낯설지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노인의 시간은 주어지기에 더 즐겁고, 더 다양한 놀이문화가 생겼으면 좋겠다. 꼭 분당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자주 만나는 장면이었으면 좋겠다.      




모든 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동화 속 한 장면에 잠깐 놀러 간 기분이었다. 나도 언젠가 그들처럼 햇살을 맞으며 예쁜 모자를 쓰고 할머니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겠지...



그 시간을 그려보며 카페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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