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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Oct 09. 2020

환생하는 구두

버선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천으로 발 모양과 비슷하게 만들어 종아리 아래까지 발에 신는 물건.’이라고 나온다. ‘버선’의 옛말은‘보션’이기도 하다.     


보션

보션    


발음이 로션 같기도 하고 외국인이 버선이라는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루는 아이가 장롱 깊숙이 넣어놓은 버선을 들고 왔다. 결혼식 때 한복을 입고 한 번도 꺼내본 적 없었다. 앞코가 뾰족하게 생기고 폭신하게 느껴지는 버선을 가리켜 어디에 쓰는 것이냐고 물었다. 한복을 입을 때 신는 양말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8살이던 아이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의 한복과 함께 버선을 신고 나왔다. 그녀의 앙증맞은 발에 신은 것은 버선만이 아니었다. 버선의 기다란 발목에 민트색의 리본을 묶고는 내게 물었다.    


“엄마, 이거 어때?”       


단아한 하얀색의 버선만 보다가 아이가 디자인한 리본 버선을 보니 새로웠다. 아이는 손을 댈 수 없는 고유의 영역이라 여겼던 버선에도 색다른 생각을 달았다. 그 리본을 보며 20대 중반에 슈즈 디자이너로 일했던 때가 떠올랐다.     

신입으로 들어간 회사는 S제화였다. 성수동에 위치했던 회사는 브랜드의 명성에 비해 허름한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70년대로 시간 여행을 하는 풍경이었다. 1층에는 슈즈를 만드는 공장이었고 그 위층은 디자이너와 마케팅 부서가 함께 일하는 사무실이었다.     


면접은 대표님과 봤다. 첫 출근 날이 되어서야 디자인팀 과장님을 처음 만났다. 그녀는 영화에서 볼 법했던 모습이었다. 보통 드라마와 현실은 다른데 과장님은 마치 텔레비전에서 연기를 끝내고 그대로 나온 듯했다. 늘 8CM, 12CM나 되는 하이힐을 신었다. 요일마다 힐들이 바뀌었다. 긴 생머리를 날리며 달콤한 향수와 함께 출근하면 배경음악이 자동 재생되었다. 앤 해서웨이를 닮았던 과장님이 다니는 길은 패션쇼의 런웨이 같았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긴 다리로 하이힐이 내는 목소리를 사무실 가득 채웠다. 같은 여자였지만 세련된 용모와 하얀 피부, 확신에 찬 말투가 매력적이었다.     


한 켤레의 구두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친다. 구두 디자이너가 있고, 옷의 재단사가 있듯 구두의 패턴을 종이에 그려 만들어 내는 실장님이 있다.

디자이너들의 머릿속에 있는 스케치들이 실제로 구두가 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시고 패턴을 만들어 주신다. 현장에 가면 가죽의 결에 맞게 재단을 전문으로 하시는 선생님들, 재단된 소재를 봉제를 하시는 장인들, 라스트라고 하는 구두의 틀에 갑피를 씌워서 창을 붙이고 굽을 다는 장인들이 있다. 완성된 구두들의 검수를 하는 현장의 총괄팀장님도 있다.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쳐 하나의 구두가 완성된다. 그 당시 기계가 아닌 여러 선생님들의 손을 거쳐 구두들이 탄생되었느니 수제구두라고 칭하는 것이 맞았다. 얼마나 숙련된 장인들이 슈즈를 만드느냐에 따라 발이 편했다. 가느다란 굽에 온 체중이 실리는 것이기에 중심이 잘 잡힌 힐은 겉보기로 판단할 수 없었다. 신어보면 알았다. 입사 전 가지고 있던 저렴한 힐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착용감을 선사했다. 장인들의 시간 속에 응축된 결과물들이었다.     


신입 디자이너는 출근을 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전날 투입된 새로운 디자인 샘플들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1층 현장에 가서 날마다 체크한다. 중간에라도 새 디자인 작업지시서가 생기면 제품에 필요한 원자재, 부자재들이 기록된 작업 지시서를 1층 현장의 장인들께 전달한다. 샘플 디자인의 구두들이 완성되면 들고 와서 과장님과 다른 팀원들과 상품성이 있는지 논의한다. 다시 보완할 점이나 색상변경이 필요하면 다시 작업 지시서를 만들어 현장에 투입한다.

다음 시즌들을 미리 준비하므로 샘플 디자인들은 쉴 새 없이 투입된다. 그렇게 약 50개 정도의 구두 디자인을 위해 수많은 슈즈를 만든다.     


신입 디자이너로서 하는 또 하나의 일은 구두의 부자재를 사러 시장에 가는 것이다. 구두마다 들어가는 가죽의 색과 소재가 다르니 각 가죽 가게에 들러 샘플을 받아온다. 장식들도 다르기 때문에 메탈, 스왈로브스키 보석, 버클, 공단, 시폰 리본 등의 부자재들을 동대문 재료상가에 들러 구입한다. 그 재료들을 구입하면서 새로운 디자인에 모티브가 될 샘플 장식 도 구입했다. 그저 보기에 예쁜 장식과 구두에 잘 어울리는 장식은 따로 있었다. 사람 관계나 음식에도 조화가 중요하듯 슈즈 디자인에도 조화로움이 가장 중요했다.    


선배 디자이너들은 어떤 디자인이 잘 팔리고 잘 안 팔렸는지에 대한 경험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 데이터는 단기간에 습득되는 것이 아니었다. 온몸으로 겪어낸 영역이었다. 그렇게 전문성이 쌓여가는 것이다.  

  

슈즈 디자인에도 파레토의 법칙이 적용되었다. 파레토 법칙이란 ‘80대 20 법칙’ ‘2대 8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전체의 결과의 80%가 전체 원인의 20%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20%의 고객이 백화점 전체의 매출의 80%에 해당하는 만큼 쇼핑하는 현상을 설명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 시즌에 약 50 디자인의 구두가 출시되면 그중 10개의 구두만이 잘 팔렸다. 그 통계를 보고 있으면 놀라웠다. 팔리는 것은 몇십 개, 몇 백개도 팔리지만 안 팔리는 경우는 단 한 개도 팔리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구두들은 따로 있었다. 공통의 취향을 분석하는 일은 정확할 수 없어서 그 확률을 위해 수많은 디자인을 했다.     

시장조사에서 사 온 재료들을 구두 디자인에 접목했다. 가죽 소재의 리본을 나팔처럼 돌돌 말기도 했고, 보석 상자처럼 정육면체를 만들어 보석을 넣기도 했다. 철로 된 소재의 버클을 디자인하고, 공단 소재의 꽃잎의 개수를 15장, 10장, 변화를 주기도 했다. 외피에 구멍을 뚫기도 했다. 보석들을 배치하기도 했다.   

  

신입의 대명사는 패기 아닌가? 그때의 나는 자연에서 가져온 돌멩이를 구두 위에 얹어보기도 했고 시계를 손목에 하는 것이 아니라 구두 앞 코에 올리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시간을 손목이 아닌 발끝을 보며 확인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왜 꽃 코르사주(꽃장식)는 꼭 양 발에 달아야 할까? 언밸런스하게 한쪽만 달면 안 될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브랜드의 가치와는 맞지 않는 실험적인 생각들이라 다 거절되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대중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작은 변화들을 도모하는 곳이었다. 많이 팔리는 디자인이 중요했다. 나도 시간이 지날수록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얌체공 같은 아이디어들은 내놓지 않게 되었다. 회사가 바라는 안정된 디자인의 방향으로 맞춰갔다.      

아이가 버선에 달아놓은 리본 끈 하나는 그때의 나의 아이디어와 도전을 떠올리게 했다. 발 등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수많은 생각들을 실로폰처럼 펼쳐 놓은 그때로 가 닿게 했다.    


그 후 하얀 운동화를 구입했다. 그리고 한쪽에는 베이지색 시폰 꽃을 달고 다른 쪽에는 포근한 핑크색 뜨개질 꽃을 달았다. 검은 구두위에는 빨강 입술 패치를 한쪽에만 달아 딸과 커플로 신고 다녔다.     

그때 거절되었던 생각들이 아이의 운동화에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슈즈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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