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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Oct 09. 2020

시간이 변하면 시각도 변한다

30대에 접어들면서 어느 순간부터 길거리의 꽃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청춘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점점 눈 속으로 입장했다. 전에는 엄마, 고모, 이모들의 핸드폰 속 프로필 사진들은 왜 다 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나이에 도착하자 마치 예약이라도  한 듯 나도 모르게 꽃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길거리를 지나다가 풀 한 포기에도 감탄했다. 생각보다 많은 종류의 꽃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몇십 년 동안 이름 모를 꽃들이 계절마다 퍼레이드를 준비하며 피고 졌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꽃을 곁에 두고 싶었다. 일주일에 한 번 꽃집에 들러 꽃을 사 오는 건 기분을 쇼핑하는 일이었다.         


지난해, 처음 알게 된 꽃이 있다. 능소화. 싱싱한 오렌지 껍질을 펼쳐놓은 듯 나팔 모양을 하고 있는 능소화는 6월이면 소리 없이 등장했다. 친구네 집 아파트 담벼락에 핀 능소화는 벽을 캔버스 삼아 우아한 붓질을 하고 있었다. 소유할 수도, 살 수도 없는 그림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반해서 매해 6월이면 친구 집에 가고 싶었다. 명소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봄에는 벚꽃이 떨어지면 기분도 같이 떨어졌다. 마치 일 년을 기다린 축제가 끝난 듯 아쉬웠다. 비라도 금방 내리는 해에는 벚꽃을 보는 시간은 짧아졌다. 기대는 아쉬움으로 아쉬움은 기다림으로 변했다. 벚꽃은 무대 위 마지막에 등장하는 탑가수 같았다.


5월 연휴를 맞아 계룡산 국립공원에 들렀다. 멀리서 본 산은 초록빛을 겹겹이 쌓아 놓고 있었다. 거대한 샐러드 같았다. 여름은 신록의 계절이라는 말을 글이 아닌 눈으로, 들숨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산 입구로 들어서는데 밤에 있어야 할 별들이 땅에 가득했다. 초록잎 베개를 베고 잠을 자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건 겹겹의 풍성한 노란 꽃. 작은 공기알 같았다. 그 꽃의 이름은 황매화였다. 황매화는 5월 초 만개하는 꽃이었다.    


올해 처음 만난 꽃이었다. 전에도 많이 만났을 수도 있었겠지만 올해 처음 존재를 안 꽃이었다. 이제 벚꽃이 졌다고 인생 다 산 듯 슬퍼할 이유가 없어졌다. 다음 바통은 황매화가 이어받고 있었다. 나만 이제껏 꽃들의 계주를 몰랐던 것이다. 수천, 수 만개의 황매화가 늘어선 광경은 아련한 벚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통통한 볼륨감이 앙증맞았다. 어깨 높이에서 피어나니 사진을 담기에도 좋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충동적으로 계룡산을 들르지 않았다면 못 만났을지도 모른다.    


5월에 피는 꽃으로 금계국도 있었다. 모양은 코스모스를 닮았고 색은 해바라기를 닮았다. 동네에는 차들이 다니는 도로가 있고 그 아래 보이지 않게 산책길이 있었다. 하천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늘 위의 길만 다녔기에 지형이 낮은 산책로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다. 5월의 저녁 마트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늘 다니던 길 말고 길 건너 산책로 방향으로 가보자 마음먹었다. 길을 건너기만 했을 뿐인데 다른 세상이었다. 도로 아래 산책길에 긴 노랑 리본이 양쪽에 풀어져 있는 듯 꽃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름 모를 꽃이었다. 얇은 줄기 끝에 진노랑이 펼쳐져 있고 잎 가운데에는 초코 볼이 들어있는 듯했다. 바람에 따라 살랑살랑 움직이면 스탠드 마이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날이 점점 어두워져 잘 보이지 않아 낮에 다시 와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꽃을 보러 가야 하는데……. 하루, 이틀 미루다가 그대로 꽃이 질 것 같았다. 더 이상 미루면 안 되었다. 흐린 날이었지만 얼마 남지 않은 꽃들의 내한공연을 즐기기로 했다. 못 보면 1년을 기다려야 했다. 비가 쏟아질지도 몰라서 우산을 챙겨 나갔다.     


세 시간, 네 시간 운전을 하고 광양 매화마을을 찾은 적이 있다. 그렇게 공들이지 않아도 걸어서 5분이면 꽃들을 만날 수 있다니……. 우연히 만난 행운이었다. 이름 있는 축제가 아니었지만 규모는 그동안 가본 어떤 축제보다 컸다. 내가 찾은 숨은 명소니 더 의미 있었다. 비밀의 정원에 들어서는 것 같았다.    


아이와 손을 잡고 금계국 축제에 입장했다. 그곳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나는 꽃들의 움직임이 발레리나 같았다. 한 송이의 꽃도 아름다운데 몇 천 송이가 군집을 이루니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했다. 그곳은 지난겨울 휑했던 산책로였다. 하천의 냄새까지 더해져 스산했던 곳이었다. 몇 달 사이 거리가 구조 변경 공사라도 한 것 같았다. 같은 집 맞나 싶은 정도로 드라마틱한 변화였다. 순식간에 노란 벽지를 바른 듯 환한 공간이 되었다. 혼자 감상에 젖어 있는데 “으악”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딸의 목소리였다. 벌이 무섭다며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괴물이라도 본 듯 소리를 질렀다. 놀이공원 속 귀신의 집에 들어온 듯 어서 이 길에서 나가자고 했다.    


“예린아, 벌을 보지 말고 꽃을 봐”

“벌이 물까 봐 무서워. 벌밖에 안 보여.”   


아이는 꽃을 보지 못했다. 나도 어렸을 때는 벌이 무서웠지……. 이제는 벌들이 꽃에 붙어 꿀을 먹는 모습마저 귀여웠다.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옮겨 다니는 벌들의 노선을 여유 있게 바라보았다. 이제 벌이 무섭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벌이 물어봤자. 얼마나 아프겠어!’라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벌은 뱀보다 무서운 존재였다. 가져간 우산이 검이라도 되는 듯 벌레와 벌이 다가오지 못하게 휘저었다. 누군가와 펜싱경기를 하는 듯했다. 아이는 벌을 보느라 내 감탄의 말과 꽃들의 움직임을 보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 예쁜 꽃을 즐기지 못하는 아이에게 화가 났다. 더 나아가 내 기분까지 방해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산책로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벌 이야기만 하는 아이를 벌주 고도 싶었다. 길 끝에 다다르자 아이가 홀가분한 미소를 지으며 드디어 끝났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같은 길을 가며 둘은 다른 것을 보았다. 돌아오는 길 생각했다.     


‘그래 아이는 자기가 꽃이겠다. 그래서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다.

인생 중반에 들어서야 보이는 것들을 청춘을 향해 달려가는 아이에게 보라고 강요했구나.’    


시간의 길목마다 보는 풍경들이 다르다.


꽃을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의 시간이 흐른다. 나는 꽃을 보고 아이는 벌을 보았다. 내가 아이 나이였을 때를 생각해 본다. 그때의 나도 꽃이 아닌 벌을 보았다. 벌은 꽃을 보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꽃을 못 본다고 아쉬워했지만 아이는 벌을 세밀하게 보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벌이 마트에서 꿀만 사가. 이 꽃은 한 가지만 파는 가게인가 봐.”          


아이의 시선에도 풍성함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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