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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Jan 10. 2023

처음, 지방방송이란 말을 듣다





친구 둘은 몇십 년이 지나도 안주처럼 이야기하는 주제가 있다.



고2, 윤리 시간이었다. 키 180이 넘는 윤리선생님은 구릿빛 피부로, 중저음의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는 게 특징이었다. 느릿한 말투와 강렬한 눈빛이 빚어낸 특유의 카리스마로 수업을 이끌었다. 명랑했던 아이들도 윤리시간만 되면 차분해졌다.


선생님은 수업을 하다가 갑자기, 복도 쪽 4 분단 책상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앉아있던 학생 두 명의 머리에 있는 힘껏 꿀밤을 때렸다. 그 강도가 얼마나 쎈지 꿀밤과 동시에 머리에서 선인장이 솟아나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수업시간에 누가 그렇게 떠들어? 둘이 밖에 나가 있어.”    


 

얼마나 할 얘기가 많았는지, 소곤소곤 떠든다고 떠들었는데  그 소리가 계속 수업에 방해된 모양이었다. 보통은 한 번 경고를 주는데, 선생님은 경고 없이 바로 응징했다. 모범생이던 두 친구는 태어나 처음으로 선생님께 혼났다. 그것도 잊을 수 없는 꿀밤으로... 동창모임에서 둘은 만나기만 하면 그 얘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이 에피소드가 떠오른 건, 학교에 다녀온 아이의 말 때문이었다.     



“엄마, 오늘 선생님이 지방방송 끄라고 하더라. 지방방송.”     



지방방송이라는 말이 웃겼는지, 지방방송, 지방방송이라며 그 단어를 반복하며 웃었다. 우리 때야, 뉴스 끝에 대전방송, 부산방송 등 지방방송이 이어졌지만, 아이는 지방방송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화의 흐름상 그 의미를 아는 듯했다.     


“선생님이 수업을 해야 하는데, 너희들이 떠들면 수업이 안되잖아. 그러니까 지방방송 끄라고 하는 거야. 선생님 말이 메인방송이니까...”     


“엄마, 우리 입장에서는 선생님 말이 지방방송이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선생님 말이 지방방송이라니..

이런 당돌한 말이 있나?      



그런데 그 말은 나를 유년시절로 데려갔다. 지하철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느라 승객들에게 혼나기도 했고, 수업시간 특별한 말도 아닌데, 종이에 적어 쪽지를 보내기도 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 보다는 내 세계가 가장 우선인 나이였다. 선생님이나 어른들은 내 세계를 자꾸 깨고 들어오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때의 내가 되어보니 아이의 말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누군가의 말을 경청한다는 건, 내 세계에서 나와야 가능한 일이었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누군가의 말들이 흘러들어왔다.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서는 모든 말들은 지방방송일 뿐이다. 이 이야기는 비단 아이들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선생님에겐 아이들의 수다가 지방방송일 수 있고

아이들에게는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이 지방방송일 수 있다.     

며느리에게는 시어머님의 말이 지방방송일 수 있고

직원들에겐 상사의 말이 지방방송일 수 있다.



지방방송의 정의는 내가 처해진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상대의 말의 지루함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개념이었다.

세상은 메인방송과 지방방송이 혼재되어 있고, 메인방송이라는 개념은 듣는 상대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쯤에서 하나의 의문이 든다.     

요즘시대에도 ‘지방방송 꺼’라는 말을 쓰다니...

언어는 시대에 맞춰 변화해야 하는 것 아닐까?



아이에게 이런 제안을 해보았다. 수업 시간에 떠드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거기, 유튜브방송 꺼.

쇼츠 꺼.”라고 해야 하지 않아?


"우와. 엄마 센스 최고인데... 그러면 애들이 기분 안 나쁘고 웃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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