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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Oct 10. 2020

처음, 씨앗을 심다

초등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 속 질문이었다. 지문을 읽고 모르는 단어를 짐작해보고 그 뜻을 사전에서 찾아 쓰라고 했다. ‘극대화’라는 단어를 잘 몰랐던 아이는 대화하다?라고 짐작했다. 내가 물었다.     


“어떤 대화를 뜻하는 것일까?”

“화내면서(극) 하는 대화?”    


틀린 짐작이었지만 아이의 상상이 재미있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대화를 한다.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대화, 업무를 위한 대화, 정보 획득을 위한 대화 등등……. 많은 양의 대화로 인해 말을 귀 기울 듣기란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 흘러 다니는 말에도 마음을 맞추어야 한다. ‘어떤 말은 흘려들어도 되고 어떤 말은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구나.라고 스스로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안경이나 현미경 같은 도구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대화’를 통해서만 상대의 마음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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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읽을 수 있는 건 많아 >    

                          

                              -안예린    


세상에 읽을 수 있는 건 많아  

  

책을 읽을 수 있고

글을 읽을 수 있고

음표도 읽을 수 있지    


상대의 마음은 읽을 수 없어    

내 몸속에 들어 있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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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9살이 되어서 책을 읽다가 이런 시를 지었다. 내가 온전한 상대가 될 수 없으니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아이와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두 개가 있었다. 한 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한 손에는 우산을 들었다. 빗방울도 우리와 동행했다. 장본 것도 무겁고 온몸을 적시는 비로 인해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가 좀 더 먼 길로 가자고 했다. 가까운 길을 두고 왜 돌아가자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격양된 목소리고 말했다.    


“그쪽으로 가면 멀어. 날씨 맑을 때 그 길로 가자. 지금은 빨리 들어가자. 비 오잖아.”    


내 말에 아이는 금방 시무룩해졌다. 아이 말을 가로막고 몇 발자국을 떼었다. 미안해서 물었다.     


“근데 왜 그쪽으로 가자는 거야?”

“저번에 학교 끝나고 친구랑 저쪽에 씨앗을 하나 심었거든. 비가 오니까 물 먹고 싹이 나왔나 보고 싶어서.”    

그 말을 듣고 내 발걸음과 마음을 유턴했다. “그러면 가서 보자.”라고 말하며 조금 먼 길로 걸어갔다. 아이가 우산을 쓰고 저만치 달려가며 작은 언덕에 싹이 나왔나 들여다보았다. 궁금증이 해결이 되었는지 뻥튀기 같은 동그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왔다.    

“아직 안 나왔어. 언제 나오지?”         



아이와 (극) 대화를 하다 보면 마음에는 2개의 문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첫 번째 문은 아이가 저쪽으로 가자고 표현했다. 자기 마음을 알렸다. 대부분의 대화가 여기에서 멈춘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표현한다. 하지만 진짜 마음은 첫 번째 문에서 드러내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만 할 뿐 그 이유를 잘 덧붙이지 않는다.

상대가 한 번 더 질문을 해야 진짜 마음이 나오곤 한다. 내가 아이에게 왜 저기로 가고 싶은 건지 묻지 않았다면 그대로 집으로 갔을 것이다. 새싹을 보고 싶었던 진짜 마음을 몰랐을 것이다.    

마음이란 건 자동문처럼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하나의 문을 열고 정성스럽게 들여다보아야 두 번째 문이 열린다. 마음을 연다는 것, 대화를 한다는 것은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힘든 것은 진짜 마음은 저 안에 있는데 두루뭉술한 것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겉도는 대화들이 많아질 뿐 진짜 마음은 잘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은 대화가 잘 통하기도 하지만 상대와 내가 너무 다르면 그 간극으로 갈등을 빚을 때도 있다. 갈등 역시 상대를 알게 되는 도구이다. 나와 남편은 늘 시소처럼 양 끝에 있다. 주차장에서 차를 댈 때면 나는 양 옆에 차가 없는 곳에 주차한다. 내리기 편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양 쪽에 차가 이미 주차되어 있어서 내 차가 그 사이로 ‘쏙’ 들어가게 주차한다. 그렇게 남편이 주차를 하는 날에는 옆 차의 문을 콕 찍으면 안 되니 문을 살살 열고 비좁은 틈으로 나와야 한다. 나와 다른 주차 스타일에, 내릴 때마다 배를 들여보내야 하는 불편함에 왜 텅 빈 곳이 있어도 좁은 곳을 골라 주차를 하는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남편이 대답했다.    


“누군가 내 옆에 차를 대다가 내 차에 스크래치 내면 어떻게 해? 내가 마지막 남은 곳에 주차를 하면 다른 사람이 내 차를 긁을 일이 없잖아.”    


사람중심주의, 편함 중심주의의 나와 차사랑 중심주의, 어려움 극복 주의 남편이었다. 서로의 생각이 이렇다 보니 사소한 것이지만 자주 부딪혔다. 대화와 갈등으로 어느 정도 합의점을 찾았다. 가족과 있을 때에는 좀 더 넓은 곳에 주차를 하고 혼자 운전하는 날에는 하나 남은 곳에 주차를 하는 것으로 절충했다. 이런 일은 빈번하다. 대화하지 않으면 상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갈등은 둘 사이를 유연하게 만들어 준다. 좋은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게 한다.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진입할 때 양 쪽에는 거대한 초록 벽이 세워져 있다. 아파트 방음벽으로 초록 넝쿨들이 가득하다. 어느 날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그 벽을 보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방음벽 중간에는 유리로 된 부분이 있었다. 다른 곳은 다 초록 넝쿨이 덮어 있는데 유리창이 있는 곳에만 비어 있었다. 이상했다. 유리창을 덮지 않고 그것만 피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했다.    


넝쿨이 올라갈 때에는 방음벽의 요철이 필요했다. 거친 벽의 표면을 지지대 삼아 위로 뻗어 나갔다. 반면 유리창은 울퉁불퉁함 없이 매끈해서 넝쿨이 달라붙지 못한 채 다른 곳으로 피해 간 듯 보였다.


넝쿨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의 갈등도 이와 같지 않을까? 서로의 마음이 달라 감정이 울퉁불퉁하다. 그 물결을 딛고 넝쿨을 위로 자라난다. 사람도 넝쿨처럼 갈등(요철)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매끄럽게 서로 피한다고 좋은 것은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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