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처럼, 인생에서 그 시간에만 마주치는 것들이 있다.
30대에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조금 커서는 보드게임에 빠져 살았다. 세대가 다른 우리를 이어주는 건 보드게임이었다. 아이가 좋아했던 건 기본 3시간은 해야 하는 <부루마블>이었고, 내가 좋아하던 건 안경천을 접어서 게임을 하는 <폴드잇>이었다. 투명한 필름지에 그려진 도형을 조합해 단어를 이미지로 만들어 내는 <이매진>이라는 보드게임도 좋아했다. 플라잉 타이거코펜하겐은 만원 미만의 보드게임을 팔아서 자주 들르곤 했다. 그때가 아니었다면 세상에 이토록 많은 보드게임이 존재했는지 모르며 살았을 것이다.
지나 보면 그 시절, 그 시간이 선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청소년이 되면서 우리 둘 사이를 이어 준 보드게임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서로 함께 하는 시간이 짧아졌고, 아이도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명확해져 각자의 섬처럼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어느 날, 경주로 가족여행 중이었다. 4시간이 걸리는 거리였다. 차 안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돌아가며 듣고, 끝말잇기를 하고, 휴게소에 들러 간식을 사 먹고, 풍경을 보고, 하늘을 보아도 여전히, 도로 위였다.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한 시간이 더 남았다. 심심함을 달랠 좋은 방법이 없을까? 스스로 물었다. 어떤 생각이 스쳤다. (분명, 몇 년 전 많은 보드게임을 접한 덕분이리라!)
“우리 차 번호 중에 가장 높은 숫자 찾는 게임 할래?”
누군가 만들어 놓은 보드게임 말고 내가 보드게임을 만들 수도 있는법. 차 안에서 할 수 있는 간단하고 모두가 할 수 있는 쉬운 게임이었다. 나른했던 차 안에 활기가 돌았다.
"좋아."
모두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옆을 스치는 차가 어떤 번호일지 아무도 몰랐다.
“4012 찾았어.”
한참 뒤,
“6078”
숫자를 찾는 즐거움에 엔도르핀이 돌았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차의 번호판을 봤다. 아무 관심도 없던 번호판이 큰 의미로 다가왔다. 누군가 더 큰 숫자를 찾을 때마다 탄성이 쏟아졌다. 목적지에 다가올수록 더 큰 숫자를 찾고 싶은 마음에 아쉬워했다.
6079가 제일 큰 숫자인 줄 알았는데, 유턴을 하기 전 승리는 내 편이었다.
“9899”
이럴수가,
거의 일등이 확실해 보였다.
거리에 차는 많았지만, 높은 숫자의 차는 얼마 없었다. 나는 기세 등등 했고, 나머지 둘은 아쉬워했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날에도 이 게임은 계속되었다. 모두 승부욕이 생겨서 그만하자고 해도 소용없었다. 의지만 있으면 안 될 것이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결국 주차장에서 아이가 9940을 찾았다. 일위가 역전되었다. 올림픽처럼 박진감이 넘쳤다.
우리끼리 하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즐거웠었기에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장거리 여행 시, 사람들이 직접 해 보아도 좋을 게임이었다. 좋은 팁이라며, 추석을 앞두고 해 보겠다는 답글이 달렸다. 며칠 후, H가 내게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9998이 찍힌 사진이었다.
9998이라니, 우리 가족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놀랐더. H를 이길 수 있는 숫자는 9999 하나뿐이었다. 그나마 1일이라는 차이로 가능성이 있어 다행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선 9999라는 차번호가 있는지 알아보았다. 검색창에 차 번호 9999를 쳤다.
있다.
있어.
언제 9999 번호의 차를 만날지 몰라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재밌는 건, 이기고 싶어 알아본 9999 번호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블로거는 1111~9999까지 몇 달에 거쳐 수집하고 사진을 찍어 기록했다. 그 방법도 즐거워 보였다. 세상에는 자기만의 방법으로 흥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다니. 보너스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 후에도,
1. 가장 작은 차 번호 찾기 0161
2. 차 번호 안의 한글로 단어 만들기 (하. 리. 보)
3. 자기 생일 번호 찾기
등의 다양한 게임을 해 보았지만, 가장 큰 숫자 찾기만큼 박진감 넘치진 않았다.
무료한 도로 위에서도 우리는 즐거울 수 있다. 한 톨의 아이디어와 의지만 있다면 말이다.
혹시 이 글을 보는 분들 중 9999를 찾는다면, 축하한다.
당신이 도로 위 보드게임의 1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