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예민해지는 시간이 있다.
하루의 끝, 잠자리에 들 때면 내 체력은 0%다. 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는 말을 믿는다. 이불을 폭 덮고 고요하게 잠들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 어쩐 일인지 아이는 잠들기 직전의 에너지가 100%인 듯, 내게 장난을 시작한다. 늦은 밤까지 방에서 숙제를 하고 나와 홀가분한 건지, 잠자리에 드는 것이 축제인 건지 늘 밤에 흥이 나 있다. 청소년이 되어서 거의 나와 비슷해진 몸집으로 누워 있는 나에게 몸을 포갠다. 가벼운 포옹에는 부드럽게 화답할 수 있는데, 레슬링 선수처럼 몸을 짓누르면 아이의 뼈가 나의 몸 곳곳은 찔러 '악' 소리가 나올 만큼 아프다. (어릴 때는 사랑스럽던 놀이였는데, 아이의 몸이 크니 고통스러운 놀이가 되었다.)
어느 날은 겨우 잠들었는데, 귀에 대고 소곤거리며 ASMR이란다. 나는 평소 잠들기가 어려운데, 그 장난에 잠을 깨버리면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아이는 장난 후 바로 잠든다. 흥은 서서히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버튼처럼 꺼진다.)
어느 날 밤, 아이가 장난을 치다 내 발을 밟았고, 나는 이성을 놓친 사자처럼 포효했다. 놀란 아이는 주눅이 들었고, 이내 풀이 죽어 방으로 들어갔다. 순간 미안한 마음이 몰려와도 상황은 배드엔딩으로 끝이 났다.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며 밤을 마무리하던 날도 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격투기 같은 날들이 반복되는 건지 씁쓸했다. 하루의 끝을 이렇게 마감하고 싶지 않은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의 ‘흥 시차’는 왜 이렇게 다른 걸까?
자신의 상황과 한계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다음으로는 나의 한계를 상대가 알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야 둘 사이의 안전지대를 만들 수 있다.
얼마 전, 또래의 딸을 둔 L과 만나 청소년에 접어든 아이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었다.
“학교 갔다 오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통 이야기를 안 해요. 옛날에는 재잘재잘 다 이야기해서 별명이 짹짹이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말이 없어지다니... 내가 궁금하니까 계속 물어봐도 시큰둥하더라고요. 그래도 아직은 대답은 잘해서 다행이에요. 방치우라고 하면 네. 어머니. 대답하고 씻어라 하면, 네 어머니. 해요. 비록 행동으로 안 옮기지만... 대답만 잘해도 화는 잘 안 나더라고요.”
“우리 애는 나보고, 하루에 질문을 두 번만 하래요.”
“00이 재치 있다.”
“대답하기 싫은 거죠.”
“그런 룰이면 하루에 질문할 거 아껴서 해야겠는데요. 허투루 쓰면 안 되겠다.”
“언제는 저녁 뭐 먹을 거야? 언제 씻을 거야? 두 번 물어봤더니 오늘 질문 끝났다고 하더라고요.”
L의 이야기를 듣는데, 00의 제안이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잔소리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을 찾아 제안했다. (부모입장으로서 질문을 3-5개 늘릴 필요는 있어 보였지만...)
살다 보면 나를 지키기 어렵다.
때로는 나를 지키기 위해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나의 경우도 지친 밤시간에는 편안하게 잠들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이런 내 마음을 몰랐을 것이다. 어떤 상황인지 표현한 적 없기 때문이다.
‘하루에 질문 두 개’처럼 우리에게도
‘11시 이후, 고요하게 잠들 준비 하기.’라는 협상이 필요했다.
삶에서 반복되는 문제가 있다면 멈춰 그 안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는 그게 잘 안된다. 회사의 업무처럼 효율을 우선시하는 습관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소소해서 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 속에서도 가장 비효율적인 건 감정이 상하는 일. 같은 일로 계속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면 둘 사이에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엄마, 하루에 질문 2개만 해줄래?”
“부장님, 하루에 저를 세 번만 찾으시겠어요?”
어느 위치든 각자의 안전지대가 잘 지켜지는 가정, 사회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