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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Oct 07. 2023

대화에서, 듣기만 해도 괜찮아요?

대화의 바다에서 상어 같은 사람들이 있다. 말을 독식하는 사람들...


독서 모임에 3년을 다닌 적이 있다.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층이 다양해서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학원 선생님 부부, 주부, 퇴직한 교수님과 여행사 대표 등등 여러 분야의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귀한 자리였다.

어느 날, 새로 들어온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모임 후 식사 시간이면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욕이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쌓인 이야기를 하면서 풀어내야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 년 넘게 같은 주제의 이야기를 반복했고, 한 번 시작하면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은데, 늘 대화는 그 사람 차지였다.

일 년 이상 반복되었던 어느 날, 독서모임의 선생님이 묘안을 제시했다.     


“00님 블로그에 글을 써보는 게 어때요?”     


그 후, 같은 내용의 말이 그녀의 블로그로 옮겨갔다. 말이 글로 옮겨지니 스크롤을 몇 번 내려도 끝나지 않는 장문의 글이 되었다. 블로그에서의 그녀의 글은 큰 인기를 누렸다. 남들은 차마 하지 못하는 가정의 속내를 투명하게 썼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이 지나자, 그녀는 웹소설 쓰기 시작했고, 지금은 웹소설 작가가 되었다. (웹소설의 특성상 빠른 시간 안에 장문을 써야 하는데, 그녀의 성격과 잘 맞았다)



대분분의 사람들이 자기가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친구들끼리 모여도 수다가 끊이지 않고, 자기 말을 하느라 상대의 말을 끊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어디든 경청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말하려는 사람은 많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말수가 적은 P를  만났다. 그 사람과 분명히 같은 공간에 머물렀는데, 말 한마디 듣지 못하고 헤어지는 일이 많았다. 처음에는 낯을 가린다고 생각했는데, 그 후로도 P는 듣기만 했다.      



P와 모임을 하고 오면 왠지 마음이 쓰였다.



왜 마음이 쓰이는 걸까? 생각해 보니 나의 유재석 병 때문이었다.  모임에 온 사람이 골고루 이야기하기를 바란다. 셋이면 셋, 넷이면 넷,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쿠키를 나눠 먹듯 대화도 골고루 나눠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화란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이뤄진 아름다운 선율이지, 독주무대는 강연에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때문인지 헤어질 시간인데, 한 사람이 너무 오래 이야기하면 불안했다. 나머지 사람들의 근황을 듣지 못하고 끝날 때면 찝찝하다 못해, 그날의 만남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런 마음 때문에 모임에서는 대화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쓴다. 그날 말을 적게 한 사람에게 질문을 해서 조금이라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한다. 


P를 알게 된 지도 2년이 다 되어가니, 궁금한 것들도 쌓여갔다.


“모임에서 듣기만 하고 가도 괜찮아요?”

“네. 저는 말 한마디 안 해도 괜찮아요. 다른 모임에 가도 주로 듣는 편이에요.”

그동안 만나온 사람 중 처음 접하는 사람이었기에 궁금했다.

“왜 듣는 게 좋아요?”

“제가 말을 하면 재미가 없다는 걸, 제가 잘 알고요. 말을 많이 하면 실수를 많이 하게 되잖아요.”


질문을 하고, 답을 듣다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딱딱한 관념들에 금이 간다. 몇 십 년 동안 고정해 놓은 생각들이라, 한꺼번에 깨지진 않지만, 다를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세상에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 대화가 끝난 저녁, 아이에게 물었다.

“네 친구들 중에는 서로 말하려는 친구가 많아?”

“아니, 말하는 친구 있고, 듣는 친구 있고, 말도 하고 듣기도 하는 반반인 친구도 있어.”

“그래? 친구 중에 듣기만 하는 친구도 있어?”

“응. 00이. 개는 묻는 말에만 답해. 그래서 그 친구에 대해서 잘 몰라.”

“너는 어떤 스타일이야?”

“나는 반반.”

“남편은 회사에서 어떤 스타일에 속해?”

“나도 듣는 편이지.”

“남편 말하는 거 좋아하잖아?”

“나는 듣고 싶어서 듣는 게 아니라, 후배들이 말을 너무 잘해서, 내가 말을 못 해.”     

다 같이 웃음이 터졌다. 말을 하고 싶은데,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니...     

“그런데 내가 잘하는 게 있어. 후배들 이야기할 때, 리액션을 잘해.”     



생각해 보니,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말하기도 하고 듣는 사람      

세 분류가 아니라, 리액션하는 사람(정말 극소수에, 귀한 사람), 말하고 싶은데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어때?”

“엄마는 말하는 사람, 나는 말하고, 듣는 사람. 아빠는 듣는 사람이지.”    

"아닌거 같은데, 우리는 아빠는 말하는 사람, 너도 말하는 사람, 나도 말하는 사람 같은데..."

 

어느 조직이든 균형을 이루며 산다는 걸 깨닫는다. (단 마음 편한 곳(가정)은 자기 마음대로) 또한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이제 P를 만날 때면 듣기만 하는 그녀의 방식에 안절부절못하지 않기로 한다.



P는 그게 가장 편하고 좋은 방식일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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