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들려오는 말이다. 집안일은 온 가족이 함께한다는 말은 어느 집 이야기인가? 우리 집에는 그런 문화가 없었다. 가족 구성원 셋 중, 그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남편은 평일 내내 일하느라 바빠서 주말은 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알아서 집안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물론, 말을 예쁘게 한다던가, 여행을 자주 가는 등 다른 장점이 있다.) 아이도 어려서 당연히 집안일에 제외되었다.
홀로 집안일은 함께 하는 것이라 외쳤지만 남편의 응답은 없었다. 그렇게 집안일은 나의 몫이었다. 파업을 할 수도 없으니, 불만인 채로 집안일을 해왔다. 그러던 어느 날, 허리디스크가 찾아왔다. 심할 때는 바닥에 떨어진 물건 하나를 집을 수 없었다. 허리를 쓰는 모든 활동에 제약이 생겼다. 휴지통의 쓰레기를 꺼내 묶는 것도 허리를 숙여야 했고,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고 꺼내는 것도 허리를 쓰는 일이었다.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뺄 때, 세수할 때도 허리가 튼튼해야 할 수 있었다. 겉모습은 멀쩡한데,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더 이상 내 허리를 혹사하면 안 되었다. 바닥에 있는 휴지통을 받침대 위에 올려서 허리를 굽히지 않게 했다. 찍찍이도 기다란 막대를 달아서 서서 쓸 수 있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개선했다. 하지만, 빨래, 설거지는 혼자만의 힘으로 개선할 수 없었다. 식기세척기를 뜯어서 위로 올릴 수 없으니, 무조건 집안일을 분담해야 했다.
주 1회, 남편과 아이(중학생)가 번갈아 가면서 설거지하라고 정하고 발표했다. 자발적으로 하길 기다렸다가는 평생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듯했다. 아이에게도 집안일을 함께 하는 습관을 기를 때가 되기도 했다. 달력에 린, 식, 린, 식 당번을 적어 놓고, 서로 미루는 불필요한 마찰을 최소화했다. 허리가 다쳤기에 그들도 나의 의견에 따랐다. 만약 허리를 다치지 않았다면 동의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둘은 역할을 정해주자 뜻밖에도 잘 수행해 나갔다. 비록 초기에는 안 하던 걸 하면서 불만이 많았지만 말이다. 그럴 때면 잘한다고 인정해 주어야 하는데, 나는 화가 났다. 한 번 하기도 힘든 일을 평생하고 있는 나를 보라고 이야기하느라 바빴다. 나도 인정받고 싶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봐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몇 주 반복되자 남편이 입에서 믿기 힘든 말이 나왔다.
“집안일이 은근히 허리를 많이 쓰네.”
아이는 “엄마 컵 좀 조금 써.”라고 잔소리했다. 설거지 후에는 행동의 변화도 불러왔다. 아이가 그릇을 아껴 쓴다. 설거지 전에는 그릇을 아무 생각 없이 썼다면 이제는 그릇에 잼이 조금 묻어있으면 손으로 닦아내서 다시 쓴다. 엄마의 일에서 나의 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늘 느끼는 것들은 그들도 함께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가 바라던 방향이었다. 함께 마음을 나누는 일. 하지 않아서 모르던 일을 알면 서로 배려할 수 있었다. 한 달이 지나자, 일요일이 되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설거지한다. 빨래도 내가 세척과 건조기까지 다 해 놓고, 빨래 개기는 아이와 함께 한다. 아이가 함께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것을 설정한다.
“린아 수건 접을 거야? 옷이랑 양말 접을 거야?”
“수건 접을게.”
(빨래 개자. 하면 싫어라고 하지만, 둘 중 선택하라고 하면 선택한다.)
아이와 함께 앉아 건조된 빨래를 접는다. (아빠는 아빠 몫의 빨래를 한다.)
과거에 비하면 놀라운 변화다. 혁명 수준이다. 이게 우리 집에도 가능한 일이었다니.
좋은 시스템을 집 안의 갈등을 줄이고 화목하게 만든다.
‘진작 시스템을 만들걸. 설거지도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일주일에 두 번으로 할걸.’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가족의 집안일 시간을 늘리면 어떻게 될까? 반발이 심하겠지? 노조가 들고 일어서 파업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