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컴퓨터 사인펜 더 있어?”
아이는 이미 사인펜 4개를 들고 있었다.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니야?”
“아니, 더 있어야 해.”
“왜?”
“사인펜 없는 친구들 빌려줘야 해.”
이은경 자녀교육전문가가 한 말이 떠올랐다. 새 학기 아이들은 자기만의 콘셉트를 만들어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아이가 택한 자기만의 콘셉트는 <보부상>이었다. 얼마 전 선물 받은 포스트잇도 필요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니, 인기가 좋았단다. 아이의 중학교 1학년 생활이 몹시 궁금했지만, 물으면 물을수록 답을 얻기 어려웠다. 궁금해도 참고 아이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조개가 입을 벌리듯 조금씩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준비물도 많고, 실수도 잦았던 새 학기. 아이뿐 아니라 엄마인 나도 덩달아 긴장이 됐다. 서로 예민해지는 시기에 나는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먼저 첫 중학교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 오늘 머리 안 감고 갔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내가 태어나서 제일 잘한 일이 오늘 아침, 5분 만에 머리를 감은 일이야. "
"왜?"
"오늘 예고도 없이 자기소개를 하더라고....”
“오늘? 아침의 선택 탁월했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소개했어?”
“나는 보컬학원 다닌다고 했어. 예상한 대로 애들이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하더라. 또 빼면 분위기에 소금 뿌리는 거니까, 그냥 했어.”
“뭐 했는데?”
“밤양갱. 애들이 박수 쳐 주더라.”
그 순간, 끊으려고 했던 보컬학원을 지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수업이었지만, 본업인 공부를 소홀히 해서 그만두어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였다. 삶은 참 알 수 없는 일. 보컬 수업을 일상에 써먹을 일이 없어서 늘 갸우뚱했는데, 자기소개 시간의 보컬학원의 효용이 드러날지 미처 알지 못했다.
“다른 애들은 어떻게 자기소개했어?”
“친구 2명은 펜싱학원 다닌다고 하더라.”
“아. 도서관 근처 거기? 2명이나?”
“응. 그 친구들 다 스물하나스물다섯(드라마) 보고 시작했대.”
“드라마의 영향이 크구나. 너도 그때, 펜싱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내가?”
“응. 기억 안 나는구나. 그럼 오늘 들은 자기소개 중에 가장 인상적인 소개는 어떤 것이었어?”
“00이 자기는 여자친구를 7명 사귀어 봤다고 하더라.”
“7명? 6학년까지 7명?”
정말 파격적인 자기소개였다. 아이가 28명의 자기소개를 들었는데, 그게 가장 인상 깊었다고 했다.
“진짜인지, 뻥인지 모르겠어.”
아이들의 자기소개 이야기를 들으며 느낀 건, 자기소개란 다른 사람과 차별화된 자기만의 이야기한다는 것이었다. 수학학원, 영어학원 다니는 것은 자기소개가 될 수 없었지만, ‘보컬학원 다녀, 웹툰 좋아해, 펜싱을 배우고 있어.’는 자기소개가 될 수 있었다. 어른이 되어 자기소개할 때는 내가 다니는 회사, 나의 직함, 나온 학교, 사는 곳,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이들처럼
“나는 재즈를 좋아해요.”
“저는 폴 댄스를 배워요.”라고 소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중 1의 자기소개 이야기를 들으며 나를 소개하는 일을 생각한다.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 달에 한 번 미술관에 가서 그림과 대화하는 사람이고, 책을 읽으면 꼭 한 개는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며, 일주일에 한 번 꽃을 살 만큼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풍경과 사물이 건네는 말을 잘 알아듣고, 동시로 그들의 언어를 번역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어느 학교를 나왔고, 무슨 회사를 다니고, 무슨 직함을 가졌다는 소개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이지만,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하는 방식은 유일함을 설명한다. 자기소개만으로도 우리는 스스로, 다르게 규정할 수 있다.
중학교 1학년들은 어른들이 놓치는 본질을 이미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