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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Oct 25. 2024

너의 속을 좀 보여줄래?

몇 권의 일기가 쌓여가면서 다 쓴 볼펜의 양도 늘어갔다.  무엇인가 공들이는 행위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데, 다 쓴 볼펜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눈에 보였다. 기록 생활을 즐기면서 내게도 취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노트의 표지는 시중에 나와 있는 것들을 쭉 써보다가 직접 원하는 표지를 만들어서 쓰기 시작했다. 내지도 처음에는 무지를 선호하다가 점이 있는 종이(불렛저널용)로 바꿨다. 볼펜은 종이 위를 미끄러지듯 써지는 젤 펜이 좋았다. 촉의 굵기도 얇은 것은 희미하게 느껴져 진한 두꺼운 촉을 사용한다. 어느 날, 편지를 주고받는 친구를 만나 문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넌 어떤 펜 써?"

“나는 고등학교부터 하이테크펜을 썼어.”

“우리 반에도 그런 친구들 있었어. 근데 하이테크펜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어?”

“내가 글을 쓰다가 원할 때, 멈출 수 있는 게 좋아.”   


  

작은 글씨를 예쁘게 쓰는 친구의 노하우를 알 수 있는 말이었다. 내가 글을 쓰다가 획을 여기서 멈추고 싶은데, 미끄러지는 볼펜은 원치 않게 쭉 나가서(컨트롤이 되지 않아) 스트레스라고 했다. 반면 나는 적은 힘을 주는데도 쭉쭉 움직이는 볼펜이 좋았다. 번져도 상관없었다. 우리는 만난 지 오래되었지만, 뜻밖의 대화를 통해 서로의 볼펜 취향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한 브랜드의 부드러운 볼펜을 쭉 쓰다가 어느 순간, 한 부분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볼펜의 몸체가 불투명해서 안의 잉크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책의 밑줄을 그어야 하는데 볼펜이 안 나오고, 강의를 들으러 가서 중요한 말을 기록하려는데 펜이 나오지 않았다. 그 상황은 마치 한참 머리를 감고 있는데, 단수되어 눈이 따갑고 마저 씻지 못하는 것과 비슷했다. 한, 두 번은 괜찮았는데, 계속 반복되니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젤펜 너를 사랑하지만, 잉크가 안 나오면 수시로 몸체를 돌려 분리해서 확인하는 생활을 청산하고 싶었다. 잉크가 보이는 펜으로 바꾸고 싶어졌다. 계절이 변하듯 나의 마음도 변했다. 잉크를 얼마나 썼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그래야 중요한 순간에 펜이 나오지 않아 짜증을 내지 않을 수 있었다.


다이소에 들러 몸체가 투명한 볼펜을 골랐다. 더불어 호기심에 0.38mm 볼펜도 샀다. 평소 쓰지 않는 얇은 펜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졌다. 볼펜과 소개팅 중이다. 나와 맞는 사람을 찾는 데에도 시간이 걸리듯, 나와 맞는 볼펜을 찾는 데에도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연애가 업데이트되듯, 내 삶의 볼펜도 업데이트해야 한다.




오늘의 다이소 쇼핑 _ 사라사 클립 검정 볼펜 0.5mm , 제트스트림 볼펜 블랙 0.38mm / 각 1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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