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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Sep 22. 2022

제주여행의 가이드 '레드향씨'

귤수집



2월의 제주도는 노랑 도트무늬 원피스를 입은 듯했다.




가로수, 동사무소 앞, 주택 안에도 노란 공들이 매달려 있었다.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노랑 산도 보였다. 수확한 귤들이 쌓여 있었다. 보기만 해도 상큼해지는 풍경이었다. 제주도를 여러 번 갔지만 2월은 6월과 다른 풍경이었다. 6월의 제주도는 수국이 가득했다. 에버랜드 튤립 축제처럼 제주의 거리는 온통 수국 축제 중이었다. 지나가다가 차를 멈춰 세우기를 여러 번. 땅에 머무르는 하얀색, 보라색, 연보라색 풍선들을 보며 또 보러 오자고 다짐했었다.



제주도의 절정은 6월인 줄 알았건만 2월도 아름다웠다.     


 

귤들이 초록 나무에 콕콕 박혀 있는 것도 모자라 바닥에 나뒹굴었다. 테니스 코트 위 공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특정한 동네만 그랬다면 이해가 되었을 텐데, 지나는 모든 길에 노란 공이 떨어져 있으니 보고도 믿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저게 지금 공 아니고, 귤 맞지?’     




바닥의 귤을 보며 나 혼자 분주하고 나 혼자 큰일 난 거 같았다. 제주 사람들은 아무 일 없는 듯 무심한데 나만 야단법석이었다. 마트에서만 보던 귤을 통째고 보고 있자니, 귤 광고 현장 같기도 했다. 그 마음으로 눈에 보이는 귤 가게로 들어갔다. 여러 크기의 귤이 있었다.      




“사장님 어떤 게 맛있어요?”

“지금 끝물이긴 한데 레드향이 맛있어요.”     




천혜향, 한라봉은 많이 들어봤는데, 레드향은 처음 들어보았다. 차에 타서 창 밖을 바라보며, 레드향 하나를 까먹었다. 귤보다 크기가 살짝 컸다. 우리가 먹던 귤의 맛은 예측 가능하기에 별 기대하지 않았다.

같은 듯 다른 처음 먹어본 맛이었다. 일단 크기가 커서 입에 넣었을 때 과즙이 가득 흘러넘쳤다. 레드향 과즙이 파도가 되어 혀 곳곳을 넘나 든다. 신맛 없이 달지만 상큼했다.     



우리가 한우를 먹을 때 등심, 안심, 업진살, 살치살 등 부위마다 맛이 다르듯 귤도 품종에 따라 달랐다. 귤의 맛은 비슷하지, 라는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가족과는 다르게 나는, 평소 과일을 즐겨 먹지 않다. 맵고 짠 음식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과일의 엷은 맛들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나마 단 딸기는 좋아했지만, 당도의 차이로 마음에 쏙 드는 딸기를 만나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서 과일은 아이의 영양을 채워주는 의무감으로 샀다.



하지만 레드향은 달랐다. 정말 맛있어서 자발적으로 챙겨 먹고 싶었다. 차 안의 우리 셋은 그날 산 레드향을 까기가 무섭게 입으로 넣었다. 까는 속도가 먹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도트 귤이 가득한 제주도의 풍경에 반해 레드향을 샀고, 처음 알게 된 레드향의 맛 덕분에 감귤박물관이 가고 싶어졌다. 여행의 계획에 없던 박물관이었지만, 작은 동그라미의 존재가 궁금해 발길을 이끌었다.




<서귀포 감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30~40개의 귤 조명이 천정에 가득했다. 투명한 귤이 반짝였다. 입구에 있던 직원에게 들어오는 길, 나무 아래 떨어진 귤을 먹어도 되냐고 물었다.



“귤이 시기마다 맛있는 게 달라서 어떤 건 떫고, 맛이 없는 게 대부분이에요. 그리고 떨어진 건 위생상(벌레, 쥐가 먹었을 수도 있다.) 먹지 않는 게 좋죠.”     



떨어진 귤도 주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버려지는 게 아까워 먹으면 안 되나? 궁금했다. 궁금증이 해결된 뒤에는 바닥에 떨어진 귤을 보며,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되었다.



박물관 안에는 세계 감귤 산업의 동향을 보여 주는 표가 있었다.

감귤 생산국은 148개국.

감귤 생산량 1위는 중국,

2위는 브라질,

3위는 인도,

한국은 26위였다.



다른 전시실에서는 버튼을 누르면 굴뚝 모양에서 감귤 입사귀향, 천연 감귤 향, 레몬 향이 나왔다. 향기를 맡아보며 미세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맛도 좋고, 향도 좋으니 귤은 버릴 게 없었다.


‘귤이 익어 가는 제주성에 올라 주렁주렁 매달린 귤을 바라보며 감상하는 일’인 <귤림 추색>은 예로부터 경관이 뛰어난 제주의 12곳이었다.  2월의 제주는, 제주성에 오르지 않아도 그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과거에는 감귤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도 알 수 있었다. 과거에는 귤로 생긴 상도 있었고, 귤나무로 인해 고통을 받기도 하고, 신분상승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귤의 역사를 다 보고 나오면 세계의 귤이 전시되어있는 식물원이 나왔다.



황금 하귤, 청견, 대포 조생, 한라봉, 천혜향, 진지향, 궁천조생, 백유 네블오렌지, 풍복조생, 홍팔삭, 대곡이예감, 소유자, 마두문단, 영귤, 사계귤, 제주레몬, 불수감, 화유, 진귤, 편귤, 사두감 등등..


귤의 종류가 많았다. 아는 이름보다 모르는 이름이 더 많아 귤에게 미안해졌다.





식물원에 들어서자 가장 눈에 띈 것은 손톱보다 작은 두금감이었다. 먹을 수 없을 만큼 작았다. 아이의 머리 크기와 비슷한 문단도 볼 수 있었다. 문단은 세계 감귤 중 가장 큰 감귤로 크기가 2kg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불수감은 마녀의 손톱 모양을 닮은 듯 기괴했다. 둘리처럼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희한하게 생긴 모양이었다. 과실 모양이 부처의 손과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노랑 손이 초록 잎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 납량특집급처럼 서늘했다. 전시실 사진에서 본 불수감을 믿기 어려웠는데 실제로 화원에서 볼 수 있어 믿을 수 있었다.






박물관을 나와서도 여행 내내 우리는 레드향에 빠져 있었다. 한 봉지를 사서 다 먹으면, 또 사러 시장에 들렀다. 마치 태국에 놀러 가서 망고를 사 먹듯 몰아 먹었다. 집에 가는 길 남편이 한 박스를 사서 가자고 했지만, 너무 무거우니 인터넷으로 주문하자고 말리며 비행기를 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레드향을 검색했는데 무슨 일인지, 파는 곳이 없었다. 그 순간 과일가게 사장님이 끝물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레드향의 수확시기가 짧아서 나오는 기간을 맞추지 않으면 먹기 힘든 감귤이었다.


기간에 집중해서 구입해야 하는 한정판이었다.



못 먹으니 더 그리워졌다. 달콤함이 입안에 뱅그르르 맴돌았다. 올해는 이걸로 끝인 걸까? 실망했다. 수능처럼 일 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니... 혹시 내년에도 까먹을지 모르니 알람을 설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 년뒤,

우리의 여행 가이드 '레드향씨'를 만나러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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