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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곤 May 15. 2022

자상하지만 다정하진 않습니다

대장정



- Image


 나 자신의 이미지는 '나'가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이미지에 대한 지배권을 갖고자 하지만 그 결말은 대개 그렇지 못하다.


 남들과 우리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대개 눈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이는 나를 꾸미곤 그 이미지 뒤로 숨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럼에도 이미지를 지배하기 위한 여정을 돌이켜보면 이미지의 주인은 나 자신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은 자연스럽게 웃고 있다지만 무의식 중에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는 우리의 얼굴 근육처럼. 이처럼 우리는 이미지를 지배하기는커녕 반대로 지배당하기 일쑤이다. 평생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남들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누가 봐도 예쁜 여자아이가 있다. 그녀의 엉뚱함과 천진난만함은 모두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하였고, 항상그녀의 얘기엔 꾀꼬리가 가득하다. 하지만 번번이 사람들이 그녀에게 가지는 호감은 사랑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낙심한 그녀는 자꾸만 그 이유를 자신의 외적인 부족함으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아쉽게도 그녀는 결코 타인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알지 못한다.


 “나는 연애를 한다면 365일 중 360일 정도는 함께 하길 바라”, “나는 우리 부모님 같은 진짜 사랑을 하고 싶어.” 분명 아름다운 꿈을 노래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겐 등골이 서늘해지는 말일 수도 있다.


 미세한 근육 경련이 바로 우리의 이미지인 것이다. 가령 이 말이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말은 하지 않는 게 더 현명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을 통해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를 보지 못한다. 꿈으로 가득 찬 머리가 하늘을 끝없이 향해 있는. 드높디 높은 이상으로 인해 지레 겁부터 먹고 마는 그녀의 구애자들을.


  그럼 나의 이미지는 무엇일까?


 빙수를 먹다 말고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오빠가 여자 친구에게 자상한 모습이 상상이 되질 않아." 남들 눈에 비친 '나'와 처음 마주한 순간이다. 아니 정정할게 "오빠는 자상하지만 다정하진 않아." 우리가 일상에서 이러한 단어를 따로 구분해서 쓴 적이 있었는가? 놀랍게도 이 네 단어는 그 순간을 마법의 웅덩이 속으로 빠뜨렸다.


 처음엔 나이가 더 많은 오빠로서, 귀엽고 천진난만하게 보이는 소심한 학생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선생을 자처했으나 이제는 서로의 역할이 바뀌어버렸다. 대개 점집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점쟁이의 지혜가 대단하길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점쟁이가 외부의 어떤 지혜 창고와 보이지 않는 관으로 연결되어 있길 바랄 뿐이지. 그들은 삶의 지혜를 창고를 통해 듣길 원한다. 이 어린 무당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양 나는 이미지(Image)에 대한 지혜를 요구한다.


 그 이후 예언가로부터 모호한 신탁을 전해 들은 근심 많은 왕처럼, "자상하지만 다정하진 않아"를 중얼중얼 입 안에 계속 넣고 다녔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상과 다정을 구분하고 썼던가? 자상이 곧 다정이고 다정히 자상이잖아. 하지만 이 순간부터 나에게 [자상]과 [다정]은 같은 것일 수가 없었다. 모호성을 파헤치는 것이 왕국의 존폐를 결정하는 열쇠라고 굳게 믿었으니 말이다. 이미지(Image)라는 왕국의 비밀을 말이다. 자상과 다정은 마치 샴쌍둥이 마냥 그 뿌리는 아마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단지 시간이 흘러 의미의 미묘한 차이가 두 머리로 나타난 것이라고.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 손에 매쓰를 쥔다. 나에겐 이 쌍두 인간을 분리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자상’과 ‘다정’의 완벽한 분리를 위한 대장정이.

 


-대장정


 지혜를 얻기 위한 대장정이 멋진 전진, 장정이 대장정이 되기 위해서는 한낱 멋진 동상이 세우는 일이 되선 안된다. 내가 노래하는 것은 영웅 서사시가 아니다. 그들은 후대에 모범이 되기 위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모습의 인물들을 제시한다. 적어도 이 [브런치]의 나는 따라야 할 모범에서 제외된다. 사람들에게 나의 미덕으로 인해 찬양받기를 요구하기보단 남모를 아픔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책이나 영화 속의 영웅들은 승리한 순간이나, 패배했다 해도 죽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그 위대함을 잃지 않는다. 이미 나의 삶은 패배로 얼룩졌음이 분명하지만 위대함을 갈망하진 않을 것이다. 삶이라고 부르는 이 피할 수 없는 패배에 직면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바로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애쓰는 것이지 않겠는가?


 대장정은 무결한 지성을 얻기 위한 여정이 아닌 패배를 받아들이고 그 패배를 이해하고자 하는 멋진 전진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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